[무등 칼럼] 코로나 19 바이러스와 바벨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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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 칼럼] 코로나 19 바이러스와 바벨탑
  • 입력 2020-03-31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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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혁 본부장

4월의 아침. 봄은 봄이되 봄이 아니다. 하수상한 세월에도 불구하고 앞 다퉈 피어있는 목련과 벚꽃은 눈이 부시다. 넘치는 화사함에 어지러움마저 느낀다. 반면, 아무래도 먼저 피어났던 동백에게는 시선을 덜 주게 된다. 그런 서러움에서인지 동백은 피눈물을 흘리며 제 꽃잎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봄의 생명이 꿈틀거리는 땅위에는 동백의 선홍(鮮紅)이 진하다.

4월은 스러짐과 태어남의 교차가 심한 달이다. 겨울추위를 이겨낸 것들은 또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혹한을 이겨내고 고개를 든 잎들은 다시 꽃샘추위를 이겨내야 한다. 그래서 시인 T.S. 엘리엇(Eliot)은 ‘4월은 잔인한 계절’이라 했다. 그렇지만 그 잔인함에 대한 토로는 역설적이게도 희망에 대한 찬미다. 인동초(忍冬草)가 있게 한 추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다.

지금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과 맞닥뜨리고 있다. 코로나 19는 전 세계를 공황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사람들은 세기말적(世紀末的) 공포에 휩싸여 있다. 지금까지 함께 살아왔던, 가까운 주변 사람들은 경원(警遠)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정부는 국민들에게 “흩어지라”고 말하고 있다. 어느 사이 지금 이 세상은 혼자 있어야, 안전한 세상이 됐다.

공포에 싸인 세상, 일상이 멈춰버린 세상. 코로나 19가 가져온 변화다. 코로나 19는 이 세상을 카오스(chaos; complex system)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성경에는 아주 오래 전에도 이 같은 일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바벨탑 사건’에 따른 대 혼란이다. 대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들은 다시 ‘교만’해졌다. 그래서 높은 탑을 쌓고 하늘에 이르고자 했다.

창조주는 교만에 빠져 불순종하는 인간들의 도전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사람들의 언어를 혼란케 했다. 사람들은 의사소통이 되지 않자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현재 지구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의 종류는 약 7천개다. 당시에는 이보다 적었겠지만 하나의 언어로 소통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수천 개의 다른 말로 이야기를 했을 테니, 그 혼란은 심각했을 것이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세계 최강국 미국을 극도의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바벨탑 미국’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인도 역시 미증유의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로 번지게 되면 지구촌은 최악의 국면을 맞게 된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절체절명의 생존 위협 앞에, 봄꽃을 보며 감탄하는 것은 생존과 무관한 사치스런 감정일지도 모른다. 지난해 12월부터 3월말까지 4개월동안 3만3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죽음은 핏빛 같은 울음을 토하며 땅에 흩어져 있는 동백꽃잎처럼 처연하다. 예상치 못했기에, 격리를 당한 뒤에 가족들과 최후의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숨졌기에, 더욱 망연하다.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가족과 생이별을 할 것이다. 모두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 찬란한 문명을 자랑하던 현대사회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종바이러스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황폐화되고 있는 것에 무력감이 크다. 어쩌면 코로나19는 현대사회를 더 미분화(微分化)시키고 기계적인 사회로 만들지 모른다. 쌩쌩 겨울바람만 불어대는 삭막한 사회가 될 가능성이 크다.

어떻게 해야 이 ‘코로나 겨울’을 잘 넘길 수 있을까? 그리하여 새로운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우리가 “잘 견뎌냈다”며 서로의 등을 두드릴 수 있는, 저 잔인한 날의 끝은 언제일까? 그날이 쉬 올까? 그것은 자연환경 파괴에 대한 반성이 전제돼야 가능할 것이다. 또 인간의 가치보다 물질의 가치를 우위에 둔 탐욕과 방종에 대한 뉘우침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죽음의 의미를 뒷전으로 미루고 살았다. 물질과 찰나적 환락에 빠져 ‘오늘’만 살았다. 테크놀로지의 현란함에 빠져 삶과 죽음이라는 근본적인 인생의 질문을 외면했다. 그 ‘외면’은 생에 대한 진지함과 이웃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는 철학부재의 세상을 만들었다. 코로나19발생 초기 아시아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냉소와 혐오가 바로 그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염세(厭世)가 아니다. 삶을 더 진중케 하는 것이다.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이다. 코로나 19는 망각하고 있던 죽음에 대한 기억을 일깨워주고 있다. 코로나19는 우리 삶을 근본부터 흔들어대고 있다.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고, 인류의 무력함을 절감해 자연 앞에 겸손해지는 계기가 된다면, 한편으로는 의미 있는 ‘잔인한 계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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