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의 멋과 맛] 두 번째, 나주 영산포와 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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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의 멋과 맛] 두 번째, 나주 영산포와 홍어
  • 입력 2020-05-22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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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포선창(일제시대).
영산포선창(일제강점기).

■ 전라도의 맛, 홍어

지난 2018년은 전라도 정도(定道) 1천년이 되는 해였다. 고려 현종은 재위 9년인 1018년에 전주와 나주의 첫 글자를 따서 ‘전라도’라는 지방행정구역을 설치했다. 전라도라는 행정명칭은 전라도가 전라남․북도로 나뉜 조선 고종 1896년까지 878년간 사용됐다. 지금은 전라도를 대표하는 도시가 광주와 전주이다. 나주가 광주에 밀려있는 모양새다.

그렇지만 음식에 관한 전라도를 대표하는 것이 홍어이니 영산포를 품고 있는 나주의 영화는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전라도 음식하면 우선 홍어를 떠올린다. 수십 가지 반찬이 즐비한 남도밥상이나 나주곰탕, 혹은 여수 게장을 꼽는 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전라도하면 홍어를 생각한다.

영산포홍어거리.
영산포홍어거리.

홍어는 전라도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특히 삭힌 홍어가 그렇다. 삭힌 홍어는 썩힌 홍어를 말한다. 작가가 초등학생이었던 때인 6~70년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한여름에도 가마니에 홍어를 넣어두고 일부러 썩혔다. 구더기가 들끓으면 그 때 홍어를 꺼냈다. 코를 확 찌르는 홍어에 막걸리 한 사발을 들어 키며 행복해 하던 뱃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홍어는 그 특유의 썩은 듯한 냄새와 톡 쏘는 독한 맛에 일반사람들이 즐겨먹는 음식이 아니다. 그러나 한번 맛을 들이면 묘한 중독감에 빠지게 된다. 영산포 홍어거리에 있는 식당에 가면 의외로 많은 여성들이 홍어정식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물론 삭힌 홍어 외에도 홍어를 주재료로 해 현대인(여성)의 입맛에 맞는 다양한 찜과 튀김요리 등을 내놓은 것도 이유다.

홍어는 잔칫집이나 상가 집의 음식상에 꼭 올라야 하는 고기다. 사람들은 상을 받을 때 홍어가 올라와 있으면 “제법 신경을 썼구만~”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혼주나 상주가 홍어가격이 비싼 탓에 간재미 무침으로 홍어회를 대신하면 내심으로는 몹시 서운하다. 모처럼 홍어 한 점 하려했는데 그 재미를 보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쉽기 때문이다.

홍어는 전라도 사람들이 먹고 살길을 찾아 서울과 경상도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일반적으로 전라도 사람들만 홍어를 즐겨 먹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홍어유통업자들에 따르면 울산과 창원 등지에 많은 홍어가 납품된다고 한다. 아무래도 경상도 사람들이 삭힌 홍어맛과 비슷한 돔배기 맛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 이유인 듯싶다.

■ 삭힌 홍어가 생긴 유래

사람들이 언제부터 삭힌 홍어를 먹기 시작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조선 후기의 학자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에는 ‘나주사람들은 삭힌 홍어를 즐겨 먹는다. 탁주 안주로 곁들여 먹는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왜 삭힌 홍어를 먹는지에 대해서는 적혀져 있지 않다. 하지만 ‘삭힌 홍어’의 유래는 고려시대 영산현에 속했던 흑산도 사람들의 내륙이주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려 때 왜구는 경상도에서 전라도 일대 해안가는 물론이고 내륙 깊은 곳까지 쳐들어와 노략질을 했다. 왜구는 처음에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경상도 해안지역을 약탈했다. 그러다가 차츰 세곡이 쌓여있는 조창과 쌀을 개경으로 실어 나르는 조운선을 공격했다. 왜구들은 내륙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몇 개월 동안을 머물며 분탕질을 하기도 했다.

전라도에 쳐들어온 왜구들의 1차 목표는 순천에 있던 조창이었다. 그 다음에는 서해안 일대의 조운선이었다. 특히 조운선은 왜구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무엇보다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구들은 수백 명에서 수천 명까지 떼를 지어 다녔는데 먹을 것이 항상 부족했다.

영산포구.
영산포구.

진도와 완도, 영광 앞바다를 거쳐 개경으로 이어지는 서해바다에는 쌀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조운선이 항상 운행하고 있었다. 조운선에는 쌀이 가득 실려 있어서 왜구를 만나더라도 속력을 내지 못했다. 왜구들은 조운선이 지나가는 뱃길 근처의 섬에 숨어 있다가 조운선이 나타나면 배를 약탈했다.

역사에 기록돼 있는 왜구의 노략질과 고려 침략은 상상을 초월한다. 고려사에 기록돼 있는 최초의 왜구 침입은 1223년(고종 10년)이다. 이때부터 고려가 망하는 1392년까지 왜구는 169년 동안 고려를 529회 침입했다. 수 백 명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왜구들이 섬과 해안지역에 상륙해 고려백성들을 죽이고 물자들을 빼앗아갔다.

특히 섬 지역은 무방비상태였다. 왜구가 나타나면 그대로 죽임을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려조정은 섬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모두 뭍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를 쇄환정책(刷還政策)이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고려 말기 왜구의 침탈로부터 섬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섬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 쇄환정책은 공도정책(空島政策)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공도정책’이라는 용어는 일제의 독도침탈(영유권주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공도정책이라는 용어는 일본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공도정책의 전제개념은 ‘국가권력이 미치는 통치대상지역이 아니다’는 것이다. 즉 고려와 조선이 방치했기에 일본이 영토로 귀속해 관리했다는 논리로 귀결되는 것이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공도정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섬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쇄환정책에 따라 흑산도 사람들은 모두 내륙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 영산현 사람들은 서해안 바다로 이어지는 강을 거슬러 올라와 지금의 나주근처 강변에 터전을 잡았다.

세월따라 바뀐 영산포구 위치를 가르키는 윤상근씨.
세월따라 바뀐 영산포구 위치를 가르키는 윤상근씨.

그곳은 영산현이 됐다. 흑산도 사람들은 새로 터를 잡은 곳의 강을 영강 혹은 영산강이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영산강과 바닷길을 되짚어 흑산도 근처까지 다시 나가 고기잡이를 한 뒤 영산강으로 돌아오곤 했다.

흑산도에서 많이 잡히는 고기중의 하나가 바로 홍어다. 홍어는 한류성 어족이다. 그래서 뱃사람들은 홍어가 남쪽 바다에서 자취를 감추면 봄이 깊어졌다고 말하곤 했다. 홍어는 발효가 되면 냄새가 심한 고기다. 그런데 이 냄새는 홍어 피부에 쌓여진 노폐물이 암모니아 발효가 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대개 동물들은 노폐물을 오줌으로 내보낸다. 홍어는 그 요소를 피부로 내보낸다. 그래서 홍어 피부에는 암모니아가 주성분인 노폐물이 가득했다. 그런데 영산포 사람들이 흑산도 일대에서 홍어를 잡아 영산포로 돌아오는 보름정도의 기간에 이 암모니아 진득한 홍어가 자연발효가 된 것이다.

다른 생선들은 상해서 먹지를 못하는데, 홍어만은 먹을 수 있었다. 암모니아 발효의 특징은 잡균들을 죽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름 정도 기간이 지나도 완전히 썩지 않고 적당히 발효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영산포 어부들이 흑산도에서 잡아온 홍어를 꺼내 먹어보니 약간의 썩은 냄새와 톡 쏘는 맛이 비위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이게 별미였다.

이 것이 영산포 사람들과 홍어가게 주인장들이 설명하는 ‘삭힌 홍어의 탄생’ 이야기다. 사실 이 이야기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쇄환정책에 따른 영산도 사람들의 영산포 이주, 영산도사람들의 흑산도일대 바다에서의 조업과 영산포 귀향. 보름정도 걸리는 항해기간과 홍어의 적당한 숙성기간들이 딱 맞아 떨어진다.

그러고 보면 명성 높은 ‘영산포 홍어’는 전통적인 개념에서 보자면 잡힌 홍어의 원산지는 흑산도여야 하고, 가공지는 영산포여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온난화로 바닷물이 따뜻해지면서 흑산도 쪽보다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대청도 앞바다에서 홍어가 많이 잡히고 있다.

그래서 엄밀히 따지면 국내산 홍어의 상당량은 원산지가 인천이다. 이와 함께 영산포 홍어의 상당량이 수입산이다. 예전에는 칠레산 홍어가 많았지만 요즘은 아르헨티나․알래스카 산홍어가 많이 수입되고 있다. 그렇지만 홍어를 제대로 숙성시켜서 ‘명품 홍어’를 만들어내는 곳은 영산포이니, 영산포 홍어의 명성에는 그리 흠될 것이 없다.

■ 홍어X 이야기

“만만한 게 홍어X”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것을 홍어X처럼 하찮게 여긴다는 뜻이다. 어쩐 이유로 홍어X이 그렇게 천덕꾸러기가 돼 버렸을까? 홍어는 암컷이 맛이 좋다. 그래서 수컷보다 가격이 훨씬 비싸다.

그래서 홍어를 잡은 어부들 가운데 일부는 수컷 홍어를 잡으면 으레 수컷의 생식기를 잘라버렸다고 한다. 수컷은 꼬리부분에 두 개의 생식기를 가지고 있는데 어부들은 그 생식기를 싹둑 잘라서 암컷 홍어로 만들어버리곤 했다.

그래서 허망하게 떼어져 버리는 수컷 홍어의 생식기를 빗대 “만만한 게 홍어X”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수컷 홍어 X을 쓱싹 잘라서 바다에 버렸던 어부들은 비양심적이기는 하지만 순진했다는 생각도 든다.

홍어X이 남자들의 정력에 좋다는, 믿거나말거나 소문만 살짝 흘렸으면 수컷 홍어가 귀하신 몸이 됐을 것이다. 어부들도 그 덕에 홍어X을 버리는 대신 그 것으로 꽤 많은 돈을 벌었을 것이다. 수컷 홍어들도 나중에는 어차피 사람 입으로 들어갈 처지이기는 하지만 당장은 잡히자마자 생식기가 싹 뚝 잘리는 수난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일반인들은 수컷 홍어와 암컷 홍어의 맛 차이를 잘 알지 못한다. 홍어를 다루는 전문적인 사람들이야 그 맛의 차이를 잘 알겠지만 삭힌 홍어는 그게 그 맛이다. 어떤 이들은 홍어 맛을 잘 모르기에 초장 맛으로 홍어를 입안에 들이 넣고 꿀꺽 삼키기도 한다.

정약전은 그가 지은 <자산어보>에서 암수를 따라 홍어 맛에 차이가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동지 후에 비로소 잡히나 입춘 전후라야 살이 두껍고 제 맛이 난다. 2~4월이면 몸이 쇠약해져 맛이 떨어진다’고만 적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홍어는 입춘전후에 잡힌 것이라야 최고의 맛이 나는 듯싶다.

요즘은 웬만한 식당에서도 삼합을 내놓는다. 삼합은 홍어와 삶은 돼지고기, 묵은 김치다. 묵은 김치에 초장을 찍은 홍어와 돼지고기를 함께 싸서 먹으면 시큼하면서도 달달한 맛이 입안을 즐겁게 만든다. 상위에 올려 진 홍어가 암놈인지 수놈인지, 혹은 입춘을 전후로 해 잡힌 것인지,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은 알 길이 없다.

그렇지만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묵은 김치에 올린 홍어 한점, 돼지고기 한 점을 오물오물하며 느끼는 행복은 구태여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게끔 한다. 거기다가 푹 끓인 홍어애국이라도 곁들일라치면 절로 콧노래가 나오는 날이다. 안주거리가 좋으니 술 한 잔을 빠트릴 수가 없다. 홍어에는 막걸리가 잘 어울린다. 막걸리에는 단백질과 유기산이 들어있어 홍어의 톡 쏘는 맛을 중화시켜 준다고 한다.

■ 영산포 홍어축제

영산포 홍어는 삭혀진 홍어를 말한다. 흑산도에서 잡힌 홍어가 영산포구까지 오면서 삭혀진 것이 영산포 홍어다. 그렇지만 어디 홍어가 흑산도 앞바다에만 잡히는가? 예전에는 신안 곳곳의 섬에서 잡혔다. 무안과 함평 바다에서도 건져 올려졌다. 그런데 영산포가 삭힌 홍어의 본산지가 된 것은 앞에서 밝힌 대로 영산현 흑산도 주민들의 영산강변 이주와 깊은 관계가 있다.

영산포는 과거 물자와 사람이 흥청이던 항구였다. 일제치하에서 호남들판에서 생산된 곡식들이 영산포구와 목포항을 거쳐 일본으로 실려갔다. 영산포는 일제강점 초창기 호남물류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이 물러가고 영산강 하구 둑이 생기면서 영산강에 뱃길이 끊기자 쇄락의 길을 걸었다. 그렇지만 영산포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히지 않고 있다. 바로 영산포 홍어 때문이다.

사람들은 전라도 하면 홍어를 떠올린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전라도를 폄훼할 때 홍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렇지만 사실 홍어는 전라도 사람들만이 즐겨하는 고기가 아니다. 전 국민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음식이다. 그래서 전라도 사람들을 홍어라 비하하는 것은 현실과 맞지 않다.

그러나 어찌됐든 홍어는 전라도를 연상시킨다. 슈퍼맨이 지구를 지키듯, 지금 영산포를 지키고 있는 것은 홍어다. 예전에는 항구를 가득 메웠던 고기잡이배들은 홍어와 갖가지 갯것들을 영산포구에 부려놓았다. 항구에 쌓여있던 쌀과 보리, 면화들은 화물선에 실려 목포를 거쳐 일본으로 향했다.

이제는 영산포에서 그런 풍경을 보기 힘들다. 인천과 부산에서 냉동차에 실려 온 홍어는 영산포의 각 홍어매장으로 실려 간다. 여기서 홍어는 숙성과정을 거친다. 먹기 좋게 썰어진 홍어는 가게를 찾아온 손님들에게 낱 포장으로 팔리기고 하고 택배를 통해 전국 각지로 배달된다. 홍어가 영산포 경제를 돌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산포 옛 선창거리에는 40여개의 홍어가게가 자리하고 있다. 영산포만의 숙성방법을 거쳐 식당에서 웰빙 요리로 만들어 내놓기도 하고, 도매로 다른 지역으로 넘기기도 한다. 영산포 옛 선창거리에 만들어진 홍어거리에 들어서면 알싸한 홍어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처음 온 이들은 코를 막고 찡그리지만, 대부분은 군침을 삼키며 식당 안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나주 영산포에서는 매년 유채꽃이 필 무렵, 홍어축제가 열리고 있다. 올해 2020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유채꽃 축제가 취소되는 바람에 홍어거리를 찾는 발걸음이 뚝 끊긴 상태다. 5월들어 코로나 사태가 잠시 진정되자 식도락가 등 방문객들이 차츰 늘고 있다. 홍어거리 바로 곁에 자리하고 있는 선착장에서는 황포돛배에 올라 1시간동안 영산강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할 수 있다.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영산포

고려 때 영산포에는 진(津)이 설치돼 있었다. 진은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보관했다가 개경으로 실어나르는 조운선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영산포진은 곡식을 노리는 왜구들의 침략이 거듭되면서 쇠퇴했다. 이후 영산포진은 사실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영산포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조선 때 영산창(榮山倉)이 설치되면서 부터다. 영산창에는 나주를 비롯 순천ㆍ강진ㆍ광산ㆍ진도ㆍ낙안ㆍ광양ㆍ화순ㆍ동복ㆍ고흥ㆍ무안ㆍ능성ㆍ영암ㆍ보성ㆍ장흥ㆍ해남ㆍ진원 등 17개 고을에서 거둬들인 세곡이 저장됐다. 영산창에는 한양으로 곡식을 실어 나르는 53척의 조운선이 있었다.

그러나 영산창은 1512년 폐쇄된다. 바다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수로가 길고 또한 소용돌이 치는 곳이 많은 바람에 배가 가라앉는 사고가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영산창은 영광 법성창에 통합됐다. 영산창은 지금의 영산동 택촌마을 야산에 있었다. 비록 영산창이 없어졌지만 영산포는 이후로도 크고 작은 고깃배들이 제법 붐비는 포구로 자리했다.

영산포에는 신안과 무안․영암을 오가며 해산물과 소금 등을 부리는 배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서해바다에서 들어오는 고깃배와 낙월도 등지에서 올라온 소금배, 무안과 영암에서 그릇들을 싣고 오는 옹기배, 젓갈배들이 물 때마다 수시로 드나들어 영산포구는 성시를 이뤘다.

또 목포에서 광주까지 가고자 하는 이들은 일단 배를 타고 영산포까지 와서 이곳에서 도보로 걷든지 아니면 지석천을 거쳐 남평, 벽진동 사창까지 이동했다. 자연 영산포에 사람들이 북적일 수밖에 없었다.

영산포에 배와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든 것은 1897년 목포항이 개항되면서부터다. 자연 호남 깊은 내륙에서 목포까지 물자를 쉽게 실어낼 수 있는 영산포가 주목을 받게 됐다. 일제는 영산강을 통해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들을 목포항으로 실어갔다. 그리고 목포항에서 일본으로 가져갔다.

영산포 영산1로에 남아있는 일본식 주택. 일본인들이 몰려와 처음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곳이다.
영산포 영산1로에 남아있는 일본식 주택. 일본인들이 몰려와 처음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곳이다.

영산포에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몰려온 것은 1900년대 초이다. 나주평야 등 호남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쌀을 싼 값에 사 모은 뒤 일본으로 가져가 비싼 값에 넘기는, 일본인 양곡중개상들이 영산포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1904년 평남환(平南丸)이라는 10톤급 발동선이 목포와 영산포 간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18시간 정도 걸리던 목포~영산포간 거리가 6시간 정도로 줄어들자 영산포는 호남내륙의 물류중심지로 급부상했다. 배들이 몰려들고 5일장이 들어섰다. 5일장을 중심으로 일본인 상점이 들어서고 일본식 명칭인 은좌(銀座) 거리도 생겨났다.

1909년 영산포헌병 장흥분견소. 영산포에 주둔했던 헌병대 일부는 장흥으로 파견돼 항일운동을 사전에 방지했다.
1909년 영산포헌병 장흥분견소. 영산포에 주둔했던 헌병대 일부는 장흥으로 파견돼 항일운동을 사전에 방지했다.
일본 헌병대가 주둔했던 건물.
일본 헌병대가 주둔했던 건물.

영산포에 사는 일본인들이 많아지자 1906년 일본인소학교(지금의 영산포여중자리)가 세워졌다. 일본으로 실어가는 쌀의 양도 커짐에 따라 일제는 1907년 영산포에 헌병분대를 주둔시켰다. 1908년에는 광주 농공(農工)은행 영산포지점이, 1910년에는 일본인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寺) 포교소와 일련종사(日蓮宗寺) 등이 각각 영산포구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동양척식회사 문서고.
동양척식회사 문서고.

일제는 영산강변의 하천답이었던 궁삼면의 토지를 사들여 일본인들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도록 했다. 또 1910년대에 동양척식회사(동척) 영산포 출장소를 설치해 본격적으로 수탈했다. 동척 영산포 출장소는 1920년대에 목포로 사무실이 옮겨지는데 현재는 문서고와 숙직실 건물이 영산강변에 남아있다.

일제시대 영산포 우체국. 나주시문화해설사 박영희씨가 우체국건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영산포 우체국. 나주시문화해설사 박영희씨가 우체국건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금의 영산포 역사갤러리는 과거 조선식산은행이 들어서 있었던 건물이다. 역사갤러리 맞은 편 건물은 과거 일제가 운영했던 우체국이었다. 우체국은 영산포의 쌀값 동향을 재빨리 목포의 일본상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세워졌다. 과거에 우체국 건물이었던 우측으로는 돌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 위쪽에는 야트막한 동산이 있다. 이곳에 낮 12시면 사이렌을 불던 오포(午砲)가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오포가 있던 곳. 전봇대가 서 있는 곳에 확성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오포가 있던 곳. 전봇대가 서 있는 곳에 확성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영산포에 있는 역사갤러리에는 ‘일본인의 이주와 정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부착돼 있다.

“영산포에는 목포개항과 동시에 1900년대 초반부터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여 현 도시구조의 기본을 갖추게 됐다. 이 지역에 일본인이 최초로 거주하기 시작한 곳은 영산리 160번지로 구영산포장의 동쪽이다.

시장터를 중심으로 일본인 상가가 번성해감으로써 원정(員町)이 형성되었고 영포교 방향으로 영산강변을 따라 상업이 활발하여 영포은좌 거리가 형성되었다. 당시 영산포의 일본인 거리는 영산강을 바라보고 영산강변을 따라 형성되었다.

1914년 영산목교의 건설은 항정(港町)에 새로운 포구를 형성시키고 신작로 공사와 맞물려 행정(幸町)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영산강변의 상점들은 새로 건설된 도로 으로 옮겨가게 되고 초기 영포은좌 거리는 쇠퇴하였으며 1914년 호남선 철도의 개통으로 영산포의 중심지는 영산목교에서 신정으로 이어지는 사거리로 바뀌게 되었다”

영산포 선창.
영산포 선창.

영산포는 호남곡창의 쌀로 부자가 된 일본인들이 활개를 치고 살았다. 영산포의 경기는 흥청댔다.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일제가 수탈해 갔던 쌀과 면화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영산포에 일본인들이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영산포가 식민지수탈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일본인이 만든 영산목교. 배가 통과할 수 있도록 다리 중간이 들어올려졌다.
일본인이 만든 영산목교. 배가 통과할 수 있도록 다리 중간이 들어올려졌다.

물자를 싣고 내리던 영산포구는 몇 차례 위치가 바뀐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는 원정 서쪽에 나무로 된 다리를 세웠는데 이 목교는 부산 영도다리처럼 배가 오갈 수 있도록 다리 일부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홍수가 나면 자주 부서지자 일본인들은 1930년대 철근을 넣은 콘크리트 다리를 부설하게 되는데 이 다리가 현재의 영산구교이다.

콘크리트 다리가 세워지면서 영산포구는 다리 주변에 다시 형성됐고 상점과 집들도 생겨났다. 이렇게 해서 생긴 거리가 서정(西町)이다. 지금 영산포 역사갤러리가 서 있는 곳은 과거의 원정이다. 황포돛배 탑승장에서 ‘영산포 등대'라고 불리어지는 영산강 수위측정시설 일대까지의 거리가 과거의 서정이다.

원정과 서정은 영산강 포구의 위치에 따라 형성된 거리다. 포구 주변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만큼 영산강 주변에는 일본식 건물과 주택들이 많다. 홍어거리 동쪽 영산 3길에 있는 건물들은 거의 모두가 일본식 주택이다. 조금씩 개조해 사용하고 있지만 원형은 일본식 건물이다.

영산포에 가면 역사갤러리 일대를 천천히 살펴보기를 권한다. 영산포의 집과 길에는 일제강점기의 오욕이 배어 있다. 또 한편으로는 영산포의 흥망성쇠 역사가 스며있다. 쇄락한 일본식 주택에서는 세월의 덧없음도 엿볼 수 있다. 영산포 거리에서 우리는 역사를 느낀다. 홍어를 먹으러 가서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보는 맛이 꽤 좋다.

도움말

박영희

윤상근

 

사진제공

나주시

양기수

 

 

 

 

최혁 기자
최혁 기자 hyuckchoi@aitimes.com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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