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멋과 맛] 영산강 강변도로와 꼭 들려야할 문화·역사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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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멋과 맛] 영산강 강변도로와 꼭 들려야할 문화·역사 유적지
  • 입력 2020-07-02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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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에서 무안까지 이어지는 영산강강변도로 모습. 총 길이 51.9㎞이나 34㎞구간만 개통된 상태다. 수려한 풍광과 함께 곳곳에 문화역사유적지가 있어 각광받는 장소가 되고 있다. (전남도제공)
나주에서 무안까지 이어지는 영산강강변도로 모습. 총 길이 51.9㎞이나 34㎞구간만 개통된 상태다. 수려한 풍광과 함께 곳곳에 문화역사유적지가 있어 각광받는 장소가 되고 있다. (전남도제공).

국내최고의 관광·문화 감상코스, 영산강 강변도로

영산강변 도로가 ‘문화관광 전남’의 견인차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2020년 3월11일 개통된 ‘영산강 강변도로’는 나주 영산포와 무안 몽탄을 잇는 도로다. 영산강 물줄기를 따라 강과 산, 들판이 어우러져 있는 수려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국내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자리매김 될 전망이다. 뿐만 아니라 도로 주변 곳곳에는 역사문화 유적지가 많아 유장한 남도역사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명품관광도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영산강 강변도로. 곳곳에 전설과 문화, 역사의 향기가 깊은 장소들이 자리하고 있다.
영산강 강변도로. 곳곳에 전설과 문화, 역사의 향기가 깊은 장소들이 자리하고 있다.
영산강 강변도로 개통 및 공사구간 지도. (전남도제공).
영산강 강변도로 개통 및 공사구간 지도. (전남도제공).

영산강 강변도로는 총 길이 51.9㎞이다. 나주 영산포에서 무안군 남악신도시까지 이어지는 도로다. 지난 3월에 개통된 34㎞ 구간은 영산포~몽탄 구간이다. 전남도는 영산포~몽탄 구간 강변도로 건설에 예산 2천51억 원을 투입했다. 공사착공 8년6개월 만에 완공됐다. 무안 몽탄에서 남악신도시까지는 미개통구간이다. 몽탄~일로 구간 4.7㎞는 400억 원을 들여 2020년 하반기에 개통된다. 일로~남악 간 13.2㎞는 2021년 착공을 목표로 현재 실시설계 중에 있다.

영산강변 도로는 남도의 젖줄이자 문화유산의 보고인 영산강을 따라 건설됐다는 점에서 뛰어난 수변경치와 곳곳의 문화·역사자원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관광코스다. 자동차로 달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전거 라이딩 코스로도 적합해 관광·레저·스포츠 도로 기능을 톡톡히 해낼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영산강이 품고 있는 각종 문화유산과 영산강 유역이 지니고 있는 역사·문화의 내용들을 어떻게 홍보하고 풀어내느냐는 것이다.

영산포에 있는 영산강 강변도로 도로 안내판.
영산포에 있는 영산강 강변도로 도로 안내판.

방문객들이 단순히 보는데 그치지 않고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는 영산강 강변도로가 돼야 한다. 이를 위해 전남역사 170회에서는 영산강변에 자리하고 있는 각종 문화 유적지와 역사적 사실·설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말 김좌근의 총애를 받았던 나합의 전설이 깃든 영산포의 도내기샘과 조창이었던 영산창, 영산포 홍어와 일본식 건물 거리, 백호 임제, 조선의 위대한 기록자 최부, 김충수 의병장과 조선수군기지 무굴포, 왕건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군자교 등을 소개한다.

영산강(榮山江)

영산강은 광주·전남의 젖줄이다. 전남 담양에서 발원해 이런저런 물줄기들이 나주에서 합쳐져 서해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강이다. 강 주변은 기름진 땅이어서 아주 먼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영산강 주변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어서 운송과 해상교통의 중심지가 됐다. 평야와 강변에 사람들이 모여 살다보니 자연 문화가 발달했다. 선사시대부터 시작된 역사는 그 깊이가 남다르다. 남도문화가 생성되고 꽃피운 현장이다.

또한 사람과 물자가 많다보니 영산강과 유역은 강력한 세력들이 패권을 다투던 곳이기도 했다. 마한세력이 둥지를 튼 후, 백제와 신라, 고려가 영산강의 주인이 되기 위해 도전과 응전을 되풀이했다. 압해의 능창은 영산강 입구 서해의 맹주역할을 했고 왕건은 그 능창을 깨부순 후 나주토호의 도움을 받아 진훤까지 격파했다. 왕건은 영산강 주변 세력의 도움을 받아 결국 고려를 건국하는데 성공했다. 영산강은 고려건국의 배경이 된 강이기도 하다.

영산강은 담양군 용면 용연리 용추봉에서 시작돼 광주광역시와 나주시, 무안·영암군 등을 지나 서해로 흘러들어간다. 본류의 총 길이는 약 150㎞, 유역 면적은 약 3,551㎢다. 유역 면적은 전남도 총면적의 29%이다. 영산강의 본디 이름은 금천(錦川), 금강(錦江)이었으나 고려 때 왜구를 피해 흑산도 일대 영산도(永山島) 사람들이 나주 강변(榮山浦)으로 옮겨온 뒤 강 이름이 영산강으로 바뀌게 됐다.

영산강은 강을 타고 바닷물이 내륙 깊은 곳까지 들어오는 강이었다. 다양한 어패류와 물고기들이 살고 있어 영산강변에는 어업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이들이 많았다. 그러던 것이 1981년 12월 영산강 하굿둑이 완공되면서 생태계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으면서 강은 생기를 잃었고, 자연 많은 어패류들이 자취를 감췄다. 4대강 사업으로 승촌보와 죽산보가 건설돼 강의 모습도 많이 바뀌었다.

70년대에 찍힌 영산강 배 (몽탄나루).
70년대에 찍힌 영산강 배 (몽탄나루).

영산강의 생태계가 바뀐 것 못지않게 안타까운 것은 영산강 유역에 둥지를 틀었던 그 수많은 강가 마을과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소멸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을이 생겨난 이야기, 주민들이 살았던 방식이 없어지고 있다. 과거와 현재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영산강에 대한 기억이 전혀 다르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영산강 유역에는 우리 선인들의 자취와 문화유산들이 제법 남아있다. 영산강 130 리를 따라가며 그 자취를 더듬어본다.

김좌근의 애첩 영산포 여인 나합(羅閤)과 영산창(榮山倉)

영산강 강변도로가 시작하는 길의 오른쪽에는 조선말의 미인 나합(羅閤)과 관련된 샘이 있다. 영강동에 있는 도내기샘이다. 샘은 전남운전면허시험장 가는 큰 길로 들어서 택촌마을쪽 좌측 좁은 길로 들어가면 있다. 도내기 길에 있다고 해서 도내기샘이라 불린다. 지금은 먹지 못하는 물이나 예전에는 마을사람이나 길가는 사람들이 마셨던 샘물로 알려졌다.

나주 삼영동 도내기샘.
나주 삼영동 도내기샘.

예전에, 도내기샘이 있었던 마을은 영산강에 인접해 있는 포구마을이었었다. 이 어장촌(漁場村)삼영리 양씨 집에 딸이 태어났는데 자라날수록 미색(美色)이 더해졌다. 이 여자아이가 도내기샘에 물을 길러 올 때마다 남정네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고 한다. 이 여자아이는 후에 기생이 돼 춤과 노래를 몸에 익힌다. 아름다운 미모에 춤과 소리 또한 뛰어나니 그녀를 본 남자들은 애간장이 녹았다고 한다.

조선말에 영의정을 세 번이나 지낸 김좌근(金左根)이 나주에 내려왔다가 그녀를 보게 됐다. 첫눈에 반한 김좌근은 한양으로 그녀를 데려가 첩을 삼았다. 양씨녀는 앞에서 말한 대로 김좌근의 총애를 받은 뒤 ‘나합’(羅閤)이 된다. 나주 출신 기생이었지만 워낙 세도가 당당해 주위 사람들은 그녀를 합부인(閤婦人)이라 불렀다고 한다.

합부인은 높임말로 사용됐으나 원래는 정실부인이 아닌 첩(妾)을 지칭하는 말이다. 합(閤)은 정 1품 이상의 정승을 지칭하는 말이나 대궐이나 양반집 대문 양쪽의 늘어서 있는 작은 문간방을 뜻하기도 한다. 나주에서 올라온 기녀 양씨를 나합이라 부른 것은 ‘첩’이라는 의미보다는 ‘나주의 정승’이라는 의미가 가깝다. 김좌근을 사랑의 포로로 잡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비꼰 이름일 수도 있다.

나합이라는 말에는 ‘나주의 조개’라는 뜻도 담겨져 있다고 한다. 후에 권세를 잡은 대원군이 안동 김씨 권세가들을 모두 처단할 때 나합 역시 끌려가 심문을 당했다. 이때 대원군은 “왜 세상 사람들이 너를 나합이라 부르느냐”고 물었던 모양이다. 이 때 나합은 이렇게 대답해 위기를 넘겼다고 전해진다.

“세상 사람들이 여자를 희롱할 때 합(蛤·대합조개)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를 ‘나주에서 온 합’이라 해 ‘나합’이라 부르는 모양입니다. 기생 출신인 저를 천시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지 어찌 저를 대감부인으로 여겨서 그렇게 불렀겠습니까? 저를 희롱하고 멸시하기 위해 그렇게 불렀을 뿐입니다.” 그 뒤에 사람들은 양씨녀를 나합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나주 금성관내에 있는 김좌근선정비.
나주 금성관내에 있는 김좌근선정비.

나합은 나주사람들의 은인이기도 했다. 조선말, 전국에 흉년이 들었을 때 나합은 김좌근을 졸라 나주에 구휼미를 풀도록 했다. 나주 사람들은 그 공에 보답하기 위해 김좌근의 선정을 기리는 비를 나주관아 안에 세웠다. 영의정김공좌근영세불망비(領議政金公左根永世不忘碑)는 깨지고 옮겨지는 수난을 겪은 뒤 지금 금성관에 자리하고 있다.

택촌(澤村)에는 과거 조창(漕倉)이었던 영산창(榮山倉)이 있었다. 조창은 고려·조선시대 호남의 세곡을 모아 한양으로 올려 보내던 곳을 말한다. 택촌마을은 영산강에 아주 가깝다. 마을과 영산강 사이에는 자그마한 산등이 솟아있어 창고가 들어서기에 최적지였다. 홍수가 나서 물이 범람해도 산등성이 위의 창고까지는 올라오지 못했다.

택촌마을 뒤쪽의 구릉에 성(城)이 설치된 것은 고려 때이다. 영산창성(榮山倉城)은 고려 말인 1390년에 축조돼 조운창으로 운영됐다. 한양으로 올라갈 쌀을 쌓아둔 창고가 있었기에 구릉에 성을 쌓고 지켰던 것이다. 영산창성은 조선 초인 1512년에 폐지됐다. 영산강이 토사로 메워지자 1512년부터 창을 폐쇄하기 시작해 1514년(중종 9)에 영산창을 폐쇄하고 조운창을 법성창(法聖倉)으로 옮겼다.

영산포 홍어거리에서 찍은 예전의 영산창 터. 건너편 아파트 좌측이 영산창이 있던 곳이다.
영산포 홍어거리에서 찍은 예전의 영산창 터. 건너편 아파트 좌측이 영산창이 있던 곳이다.

사람들이 택촌마을에 터를 잡기 시작한 것은 1천500년 전이다. 나주 나씨 18세손 덕준(德峻)이 이거하면서 마을이 생긴 것으로 알려졌다. 택촌(澤村)이라는 명칭은 1870년대 이후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펴낸 <영산강유역 마을의 역사와 문화>에는 택촌마을의 역사와 예전 마을사람들의 삶이 자세히 나와 있다.

영산포 홍어거리와 영산포의 일본풍(日本風) 거리

택촌마을 영산강 건너편에는 홍어거리가 있다. 홍어거리에는 홍어를 재료로 해서 각종 요리를 내놓은 음식점이 수십 개가 있다. 흑산도 쪽에서 잡힌 홍어도 있지만 값이 너무 비싸다. 그래서 칠레산 등 외국 바다에서 잡힌 것들이 주로 요리된다. 찜과 튀김, 탕 등을 코스로 먹는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주종은 ‘보리(홍어)애국’이다.

영산포홍어거리.
영산포홍어거리.

사람들이 언제부터 삭힌 홍어를 먹기 시작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조선후기 학자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에는 ‘나주사람들은 삭힌 홍어를 즐겨 먹는다. 탁주 안주로 곁들여 먹는다’라는 기록이 있다. ‘삭힌 홍어’의 유래는 고려시대 영산현에 속했던 흑산도 사람들의 내륙이주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려 때 왜구들의 노략질이 심했다. 그래서 고려조정은 섬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모두 뭍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를 쇄환정책(刷還政策)이라 한다. 진도는 물론이고 흑산도 등 서해안 일대 섬 주민들은 모두 뭍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 흑산도는 당시 영산현에 속했는데 영산현 사람들은 서해바다로 이어지는 강을 거슬러 올라와 터전을 잡았다.

흑산도 사람들은 새로 터를 잡은 곳의 강을 영강 혹은 영산강이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영산강과 바닷길을 되짚어 흑산도 근처까지 다시 나가 고기잡이를 한 뒤 영산강으로 돌아오곤 했다. 이 때 흑산도 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홍어를 포함해 고기들을 싣고 왔다. 그런데 보름정도의 항해기간에 홍어만 빼고 나머지 고기는 모두 썩거나 상해버렸다.

영산포 어부들이 흑산도에서 잡아온 홍어를 꺼내 먹어보니 약간의 썩은 냄새와 톡 쏘는 맛이 별미였다. 이것이 영산포 사람들과 홍어가게 주인장들이 설명하는 ‘삭힌 홍어의 탄생’ 이야기다. 쇄환정책에 따른 영산도 사람들의 영산포 이주와 영산도 사람들의 흑산도에서의 고기잡이 등이 어우러져, 삭힌 홍어가 만들어진 것이다.

홍어는 냄새가 심한 고기다. 다른 동물들이 노폐물을 오줌 등으로 내보내는데 반해 홍어는 암모니아가 주성분인 노폐물을 피부로 내보낸다. 홍어의 독한 냄새는 홍어 피부에 쌓여진 노폐물이 암모니아 발효가 되면서 생겨난 것이다. 암모니아는 잡균들을 죽이는 효능이 있다. 그래서 보름 정도 지나도 완전히 썩지 않고 적당히 발효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영산포의 집과 길에는 일제강점기의 오욕이 배어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영산포구 주변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만큼 영산강 주변에는 일본식 건물과 주택들이 즐비하다. 홍어거리 동쪽 영산 3길에 있는 건물들은 거의 모두가 일본식 주택이다. 조금씩 개조해 사용하고 있지만 원형은 일본식 건물이다.

옛 영산포 선창의 모습.
옛 영산포 선창의 모습.

영산포에 배와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든 것은 1897년 목포항이 개항되면서 부터다. 자연 호남 깊은 내륙에서 목포까지 물자를 쉽게 실어낼 수 있는 영산포가 주목을 받게 됐다. 일제는 영산강을 통해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들을 목포항으로 실어갔다. 그리고 목포항에서 일본으로 가져갔다.

영산포에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몰려온 것은 1900년대 초이다. 나주평야 등 호남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쌀을 싼 값에 사 모은 뒤 일본으로 가져가 비싼 값에 넘기는, 일본인 양곡중개상들이 영산포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1904년 평남환(平南丸)이라는 10톤급 발동선이 목포와 영산포 간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18시간 정도 걸리던 목포~영산포간 거리가 6시간 정도로 줄어들자 영산포는 호남내륙의 물류중심지로 급부상했다. 배들이 몰려들고 5일장이 들어섰다. 5일장을 중심으로 일본인 상점이 들어서고 일본식 명칭인 은좌(銀座) 거리도 생겨났다.

일본으로 실어가는 쌀의 양이 많아짐에 따라 일제는 1907년 영산포에 헌병분대를 주둔시켰다. 영산포에 있는 역사갤러리에는 ‘일본인의 이주와 정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부착돼 있다.

‘영산포에는 목포개항과 동시에 1900년대 초반부터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여 현 도시구조의 기본을 갖추게 됐다. 이 지역에 일본인이 최초로 거주하기 시작한 곳은 영산리 160번지로 구영산포장의 동쪽이다.

시장터를 중심으로 일본인 상가가 번성해감으로써 원정(員町)이 형성되었고 영포교 방향으로 영산강변을 따라 상업이 활발하여 영포은좌 거리가 형성되었다. 당시 영산포의 일본인 거리는 영산강을 바라보고 영산강변을 따라 형성되었다.

영산포 영산1로에 있는 일본식 주택.
영산포 영산1로에 있는 일본식 주택.

‘영산포에는 목포개항과 동시에 1900년대 초반부터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여 현 도시구조의 기본을 갖추게 됐다. 이 지역에 일본인이 최초로 거주하기 시작한 곳은 영산리 160번지로 구영산포장의 동쪽이다.

시장터를 중심으로 일본인 상가가 번성해감으로써 원정(員町)이 형성되었고 영포교 방향으로 영산강변을 따라 상업이 활발하여 영포은좌 거리가 형성되었다. 당시 영산포의 일본인 거리는 영산강을 바라보고 영산강변을 따라 형성되었다.

1914년 영산목교의 건설은 항정(港町)에 새로운 포구를 형성시키고 신작로 공사와 맞물려 행정(幸町)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영산강변의 상점들은 새로 건설된 도로로 옮겨가게 되고 초기 영포은좌 거리는 쇠퇴하였으며 1914년 호남선 철도의 개통으로 영산포의 중심지는 영산목교에서 신정으로 이어지는 사거리로 바뀌게 되었다‘

영산포는 호남곡창의 쌀로 부자가 된 일본인들이 활개를 치고 살았다. 영산포의 경기는 흥청댔다. 역(逆)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일제가 수탈해 갔던 쌀과 면화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영산포에 일본인들이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영산포가 식민지수탈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영산포 거리에서 우리는 역사를 느낀다. 오늘의 한국을 생각해봄직하다.

백호(白湖)임제(林悌) 문학관과 영모정(永慕亭)

영산강 강변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영모정(永慕亭)과 백호문학관을 만나게 된다. 임제 선생의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순(子順)이다. 호는 백호(白湖)·풍강(楓江)·벽산(碧山)·소치(嘯癡)·겸재(謙齋)다. 백호 선생(1549~1587)은 오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한 가선대부(嘉善大夫) 임진(林晉) 장군의 장자로 태어났다.

백호 임제 상.
백호 임제 상.

초년에는 술과 여자를 가까이하며 지냈다. 22세에 대곡 성운(成運) 선생을 만나 그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29세에 알성문과에 급제했다. 벼슬이 예조정랑까지 오르지만 평안도사를 제수 받아 임지로 가는 길에 송도에 들러 죽은 황진이 무덤 앞에서 추모제를 지낸 것이 탈이 나 벼슬을 그만두게 됐다. 이후 산천을 주유(舟遊)하며 많은 글을 남겼다.

그의 문학세계는 담대하고 쾌활했다. 의협심이 강했으며 표리부동한 권력층의 위선을 냉정하게 비판했다. 자주정신도 높았다. 선생이 30세에 임종하면서 지은 ‘물곡사(勿哭辭)’는 ‘중국에 사대하는 조선의 비굴한 모습’을 한탄한 내용이다. 사대에 대한 비판과 함께 자주정신을 지녀야 한다는 선생의 당부가 담겨 있다.

백호문학관 입구 안내표지판.
백호문학관 입구 안내표지판.

백호는 700여 편의 시와 한문소설 '원생몽유록' '수성지' '화사' 등의 작품을 남겼다. 선생은 조선이 배출해낸 걸출한 풍류시인이었다. 또한 사상가였으며, 사회비평가였다. 그가 남긴 글은 인문지리에서부터 한문소설에까지 다양하다. 전국산천을 유람하며 방랑의 서정을 담은 서정시(敍情詩)가 제일 많다.

시 경향은 요즈음 기준으로 표현하자면, 낭만적이다. 봉건주의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와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본능이 작품 곳곳에서 엿보인다. 후천적이라기보다는 선천적인 반골형 기질이다. 절과 승려에 관한 시, 기생과의 사랑을 읊은 시가 많은 것도 특색이다. 선생은 기풍이 호방하고 재기가 넘쳤다

백호문학관은 조선 중기 시인이자 문신인 백호 임제 선생의 문학사상과 뜻을 기리고자 지난 2013년 건립됐다. 33억 원을 투입 2개월간 리모델링한 뒤 지난 2017년 4월 재개관했다. 백호문학관은 3층 규모로, 수장고·집필실·문학사랑방·전시관 등이 갖춰져 있다. 상설 전시실에는 백호 선생의 생애에 대한 설명과 작품이 시기별로 나누어 전시돼 있다.

백호문학관은 대단히 의미가 깊은 문학관임에도 찾는 이들이 별로 없다. ‘황진이 추모사’나 ‘한우가’는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으나 정작 그 시를 지은 백호 임제의 이름을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영산강변을 달리다 백호문학관에 잠시 들려 호탕한 백호의 시들을 감상해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영모정.
영모정.

백호문학관 조금 못 미처 영산강을 굽어보는 자리에 정자 하나가 세워져 있다. 영모정(永慕亭)이다. 영모정은 영산강의 풍광을 품에 안고 있는 정자다. 귀래정 임붕(林鵬 1486~1553)을 위한 정자다. 임붕은 나주임씨 15세(世)로 회진의 대종가에서 태어나 승지와 절도사, 경주부윤, 광주목사를 지낸 분이다. 학문이 깊었고 덕망이 높았다. 부친 임평이 돌아가시자 이곳(영모정 자리)에 머물며 귀래당이라 했다.

3년 후 임붕이 사망하자 아들 임복, 임진, 임몽이 또한 같은 장소에서 머물며 상(喪)을 마쳤다. 둘째 아들 임복이 1556년에 정자를 세우고 어버이를 길이 추모하며 영모정이라 했다. 영모정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일 나주임씨 대종중 삭회가 열린다. 영모정 내에는 임붕 유허비와 임제 기념비, 임긍수 추모비 등이 있다.

영모정 앞에는 영산강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
영모정 앞에는 영산강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

영모정은 나주 임씨의 후손들과 문사(文士)들이 조상을 기리면서 학문을 논했던 곳이다. 영산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어 절로 시심이 솟구칠만한 곳이다. 고색이 창연한 영모정과 수백 년 된 나무들이 어울려 고고하면서도 적요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영모정에서 바라보는 영산강의 풍경이 눈에 부시도록 아름답다.

무안 몽탄의 김충수 의병장과 전라도 수영터 대굴포

영산강 변 몽탄과 함평 곳곳에는 임진·정유년에 왜적에 맞서 이 산하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숨져간 김충수(金忠秀)의병장과 가문 사람들의 자취가 남겨져 있다. 영산강 물결에서는 김충수 의병장과 함께 의롭고 용맹스럽게 죽음을 함께 한 정부인(貞夫人) 나씨의 숨결도 느낄 수 있다.

대굴포 영산강변에 있는 김충수선생 정유재란 격전순절 옛터 안내문.
대굴포 영산강변에 있는 김충수선생 정유재란 격전순절 옛터 안내문.

어디 그뿐이랴, 무안 몽탄 일대의 영산강변에는 김충수 의병장과 함께 생사를 같이 했던 1천여 명 의병들이 적을 맞아 싸우면서 내지르던 함성이 곳곳마다 스며있다. 1597년 조선을 다시 침략한 왜적들은 전라도 공략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일본 수군은 조선수군을 몰살시키려다 오히려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대패했다.

왜적들은 명량해전 참패 분풀이를 전라도 해안지역 조선백성들을 상대로 저질렀다. 진도·해남지역에 상륙해 조선의 백성들을 무차별 죽이고 재물을 노략질했다. 코를 베어 전공(戰功)으로 삼고 여자들은 겁간한 뒤 죽이거나 끌고 갔다. 왜적들은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와 영암·무안·함평·남평 일대를 노략질했다.

왜적들이 들어와 마구잡이로 백성들을 죽이고 있다는 소식에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머물고 있었던 김충수 선생은 왜적들을 물리치는데 한 몸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향민(鄕民) 1천여 명을 모았다.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호미와 낫을 들고 의병이 됐다. 김충수 선생 역시 무인이 아니었지만 칼을 차고 의병들을 지휘했다.

김충수 의병장은 왜적의 전선이 영산강 하류인 몽탄강(夢灘江)하류 쪽에 정박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김충수 의병장은 가족들을 대곡산(大曲山)에 머물게 한 뒤 상류에서 배를 몰고 가 왜적들과 싸웠다. 김충수와 김덕수 형제, 최오, 정기수, 송박, 박종룡 등은 조총으로 무장한 수많은 왜적들에 맞서 조선과 이 땅의 백성들을 지키려 했다.

그렇지만 수도 많고 싸움에 능한 왜적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충수 의병장은 어쩔 수 없이 대곡산으로 후퇴해 싸웠으나 결국 김충수 의병장과 아내는 그곳에서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1천여 명의 의병들 역시 모두 그곳에서 살육을 당하거나 왜적들에게 포로가 됐다. 몽탄강 유역은 호남의병사(湖南義兵史)에 있어 매우 중요하고 의미가 깊은 곳이다.

그러나 김충수 의병장이 왜적을 맞아 혈전을 치른 몽탄강 대굴포 전투는 물론이고 박제(朴悌)와 그의 처조카 송박(宋珀)등이 중심이 돼 치른 무안읍 매곡리 보평산 전투 등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몽탄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호남 의병사에 대한 조명과 유적지 보존이 절실하다. 특히 김충수 의병장 일가의 충혼과 기개를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몽탄 지역의 영산강변을 따라 목포방향으로 내려가면 도로 우측에 야구연습장이 보인다. 함평 기아챌린저스필드다. 기아챌린저스필드를 끼고 뒤쪽으로 돌아가면 표지판 하나가 길가에 세워져 있다. 그 표지판에는 그 일대가 전라도 수영터인 대굴포였음을 알려주는 내용이 써져 있다.

대곡마을 입구에 있는 대굴포 수군영 안내문.
대곡마을 입구에 있는 대굴포 수군영 안내문.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대곡마을 입구에 있는 대굴포는 전라도 수군의 최고 지휘부가 있었던 수영(水營)터이다. 본래 수영은 전라북도 옥구에 있었다. 그런데 1408년(태종8년) 12월 전라도 수군절제사의 요청에 따라 전라도 수군 본부를 대굴포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전라도 수군본부는 1432년(세종 14년) 목포로 이전되기 전까지 23년 동안 대굴포에 있으면서 서남해안 일대의 방어를 담당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대굴포 수영에 전선 24척(대선 8척, 중선 16척)이 있었으며 수군 1천895명이 배치돼 있다고 기록돼 있다. 대곡마을 일대에는 이곳이 과거 큰 수군진영이었음을 알려주는 지명들이 남아있다. 영산강 물줄기가 막힘에 따라 대굴포 앞 강폭은 크게 줄어들었다. 60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기에 지금의 대곡마을 입구의 모습에서 2천여 명에 가까운 수군이 주둔했던 수군본부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매우 어렵다.

대굴포는 넓은 강폭이 있었던 곳이기에 전선들이 쉽게 오갈 수 있었다. 또 많은 전선을 접안시킬 수 있었으며 배를 만들고, 병사들을 훈련시킬 수 있는 넓은 장소가 있었기에 수군진영으로 매우 적합한 곳이었다. 대곡마을 입구 건너편의 논밭들은 과거 전선들의 정박지였다. 영산강 하구언 건설로 물길이 끊어지고 강폭이 줄어들면서 포구가 논밭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김충수 의병장은 대굴포에서 의병들과 함께 배를 몰고나가 적선과 싸움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연유로 대굴포 인근에는 ‘귀암 김충수선생 정유재란 격전순절 옛터’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 안내판은 지난 2013년 10월 29일에 세워졌다. 영산강변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의병들의 숭고한 정신을 잠시나마 기려보는 것도 뜻 깊은 일일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전설이 담긴 파군교(破軍橋)

기아챌린저스필드를 지나 무안방향으로 5분 정도를 가면 아주 작은 다리 하나를 만나게 된다.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다리다. 그러나 이 다리는 매우 의미 깊은 전설이 담겨 있다. 고려를 세운 왕건이, 진훤(견훤)이 지휘하는 후백제군과 싸우다 수적인 열세를 딛고 극적으로 승리한 곳으로 전해졌다.

파군교.고려 태조왕건이 진훤군사를 물리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파군교.고려 태조왕건이 진훤군사를 물리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왕건은 877년에 한주 송악군에서 사찬(沙湌) 융(隆)의 아들로 태어났다.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예성강 상단의 우두머리였다. 궁예의 세력이 커지자 왕륭은 송악에 궁궐을 지어 궁예에게 바쳤다. 궁예는 왕륭을 금성태수(김화․창도․철원)에, 아들 왕건은 송악태수(발어참성 성주)로 앉혔다. 898년 궁예는 송악에서 후고구려의 왕으로 즉위했다.

왕건은 궁예의 장군이 돼 많은 공을 세웠다. 한강 유역은 물론이고 서해안과 지금의 경남 일대 남해안까지 진출해 위세를 떨쳤다. 왕건은 견훤이 장악하고 있는 호남지역에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애를 썼다. 왕건은 903년 나주의 토호인 오다련을 찾아갔다. 오다련은 왕건에게 군량미와 군마 등을 제공하며 도왔다.

오다련은 왕건이 영광 항화도항과 함평 손불 군유산에 군사기지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왔다. 영암 신북의 여석산 숫돌을 제공해 병사들이 칼날을 잘 갈수 있도록 했다. 여석산의 숫돌은 매우 질이 좋아서 당시 병사들의 전투필수품이었다. 910년 오다련의 딸은 왕건의 부인(장화왕후)이 됐다. 장화왕후는 2년 뒤인 912년 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무'라 했다. 무는 고려 2대 왕인 혜종이 됐다.

왕건은 교통과 물자의 요충지인 나주일대를 차지하기 위해 903년과 909년, 914년 세 차례에 걸쳐 나주를 공략했다. 왕건과 진훤은 영암 덕진포와 몽탄강, 극락천 일대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903년 왕건은 후백제의 배후를 치기위해 서해안을 따라 내려왔다. 지금의 신안군 압해면 고이도에 상륙해 성을 쌓고 내륙진출을 모색했다.

왕건은 무안의 다경포진과 임치진을 점령하고 영산강을 따라 나주 동강에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반격에 나선 진훤 군사들의 맹공을 버텨낼 수가 없었다. 왕건은 나주 동강의 몽송이라는 곳까지 밀려와 결국은 진훤 군사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도주를 하려해도 앞에는 깊은 강물이었고 사방은 모두 진훤의 군사들이었다.

몽탄지역의 영산강. 몽탄은 왕건이 꿈속에 나타난 도인의 충고를 들어 목숨을 건졌다는 설화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몽탄지역의 영산강. 몽탄은 왕건이 꿈속에 나타난 도인의 충고를 들어 목숨을 건졌다는 설화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이때 왕건이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지금 영산강 물이 빠졌으니 빨리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라. 무안 청용리 두대산으로 향하다 천(川) 하류에 군사를 매복하고 있으면 진훤군이 쫓아올 것이니 이를 공격하면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왕건이 이를 따라 그대로 행했더니 목숨을 건지고 전투에서 승리하게 됐다. 그래서 현재 몽탄교가 있는 지역을 꿈 夢 여울 灘을 써서 몽탄강(夢灘江)이라 하고, 진훤군의 군사를 깨뜨렸다(破軍) 해서 파군교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몽탄에 있는 조선의 위대한 기록자이자 선비 최부 선생의 묘

몽탄에는 조선의 위대한 기록자 최부(崔溥)선생의 묘소가 있다. 최부선생은 1488년 음력 1월, 배를 타고 제주도 별도포(別刀浦)에서 해남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험한 바다에서 13일 동안 표류했다. 천신만고 끝에 중국 해안에 상륙했으나 해적들의 습격을 받아 생명을 위협받기도 했다. 최부선생은 지혜와 침착함으로 각종 위기를 넘기면서 43명을 이끌고 1488년 6월 4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돌아왔다.

최부선생은 135일 동안 8천 800여 리(3천 200km)를 걸어오면서 명의 정치․경제․문화․군사 상황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기록하고 분석한 견문록을 썼다. 이 견문록이 바로 <표해록>(漂海錄)이다. 표해록은 이탈리아의 상인이었던 마르코 폴로(1254~1324)가 쓴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1299)과 일본 승려 옌닌(圓仁,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9세기)등과 함께 세계 3대 중국 기행문으로 일컬어진다.

영산강 몽탄수역의 늘어지. 조선의 위대한 기록자 최부 선생의 묘는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604번지 늘어지(느러지)마을 입구에 있다. 늘어지전망대에서 보면 영산강이 굽이돌아가는 곳의 땅이 한반도 지형을 닮았는데 그 중간에 있는 마을이 최부 선생과 선생의 부친 최택 선생의 묘가 있는 곳이다.
영산강 몽탄수역의 늘어지. 조선의 위대한 기록자 최부 선생의 묘는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604번지 늘어지(느러지)마을 입구에 있다. 늘어지전망대에서 보면 영산강이 굽이돌아가는 곳의 땅이 한반도 지형을 닮았는데 그 중간에 있는 마을이 최부 선생과 선생의 부친 최택 선생의 묘가 있는 곳이다.

최부 선생은 1454년(단종2)부터 1504년(연산군10)까지 살았던 조선의 선비이자 학자였다. 최부 선생은 나주목 곡강면 성지촌(지금의 전남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 성지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때 점필재 김종직의 문집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함경도 단천(端川)으로 귀양을 갔다. 그리고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때 참수됐다.

최부선생 사적비. 사적비 위쪽에 있는 최부 선생과 아버지 최택의 묘는 명당으로 꼽히는 곳이다. 영산강에 하구언이 세워지고 강변의 갈대밭이 모두 메워지면서 산세와 수세가 많이 바꿔져 버렸지만 최부선생의 묘에서는 영산강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눈에 다 담을 수 있다. 영산강변 도로를 달릴 때 꼭 찾아봐야할 곳 중의 하나다.
최부선생 사적비. 사적비 위쪽에 있는 최부 선생과 아버지 최택의 묘는 명당으로 꼽히는 곳이다. 영산강에 하구언이 세워지고 강변의 갈대밭이 모두 메워지면서 산세와 수세가 많이 바꿔져 버렸지만 최부선생의 묘에서는 영산강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눈에 다 담을 수 있다. 영산강변 도로를 달릴 때 꼭 찾아봐야할 곳 중의 하나다.

그의 나이 쉰 한 살이었다. 연산군은 생모 윤씨의 폐비와 관련해 120여명의 대신과 관련자들을 숙청할 때 과거 자신을 비판했던 최부를 참형에 처하도록 했다. 최부선생은 김굉필과 함께 호남 사림의 큰 뿌리가 된 학자이다. 지도를 받은 외손들과 제자들이 호남 사림의 맥을 이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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