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멋] 구례 화엄사에 돌 두꺼비가 있는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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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멋] 구례 화엄사에 돌 두꺼비가 있는 사연
  • 입력 2020-07-31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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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화엄사에 있는 돌두꺼비. 일제의 패망을 바라는 뜻을 담아 화엄사스님들이 일제강점기에 일본헌병들의 눈을 피해 만들었다.
구례 화엄사에 있는 돌두꺼비. 일제의 패망을 바라는 뜻을 담아 화엄사스님들이 일제강점기에 일본헌병들의 눈을 피해 만들었다.

한국에게 일본은 ‘목의 가시’다. 고려·조선 초 왜구들의 침략과 약탈은 이 땅의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수천 명 씩 떼 지어 남도의 섬과 해안가에 상륙한 왜구들은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끌고 갔다. 불 지르고 약탈했다. 조선 말, 일본은 강력한 군사·경제력을 앞세워 조정을 유린하고 조선백성을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나라까지 빼앗았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일제는 흡혈귀처럼 조선의 부(富)를 빨아먹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기 조선청년들을 총알받이로 쓰기위해 전쟁터로 끌고 갔다. 감언이설로 조선처녀들을 속여 군인들의 욕구분출구로 삼았다. 조선독립 운동가들은 잔인하게 죽이고 그 가족들도 사지로 몰아넣기 일쑤였다. 일본이 조선에 저지른 해악(害惡)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다.

일본 아베 신조 총리. 정한론자들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수출규제를 통해 한국을 압박하는 등 적대적 정치행보를 보이고 있다.
일본 아베 신조 총리. 정한론자들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수출규제를 통해 한국을 압박하는 등 적대적 정치행보를 보이고 있다.

광복 후 어렵사리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뤄졌지만 한국은 여전히 일본의 ‘준 식민지’였다. 일본경제에 예속된 한국경제는 일본의 선진기술 이전을 위해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대일무역적자는 수십 년 동안 계속돼 왔고, 일본경제는 한국경제를 일정부분 희생양으로 삼아 성장을 거듭했다. 문화·예술분야에 있어서도 일본은 한국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일본 우익인사들은 한국을 ‘과거 일본의 식민지 나라’라는 연장선상에서 깔보고 무시했다. 과거사에 대한 사죄나 반성 없이 ‘일제지배가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이 됐다’는 식의 억지와 아전인수식 역사해석으로 한국민을 분노케 했다. 일본은 조선강점 과정에서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키고 ‘다케시마는 일본의 고유한 영토’라는 억지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정신대나 위안부, 징용자 문제에 있어서도 일본은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아베 총리의 고조부 오시마 요시마사(大島 義昌). 오시마 요시마사의 주도아래 일제는 1895년 경복궁(景福宮)을 습격(襲擊), 명성왕후를 시해했다.
아베 총리의 고조부 오시마 요시마사(大島 義昌). 오시마 요시마사의 주도아래 일제는 1895년 경복궁(景福宮)을 습격(襲擊), 명성왕후를 시해했다.

일본은 반도체와 조선 등 산업분야에서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에 대한 손해배상 판결’을 명분삼아 2019년 7월 한국으로 수출되는 반도체 핵심 소재 3가지에 대해 규제를 강행했다. 일본은 고순도 불화수소 등 3개 품목을 통제하면 한국경제의 핵심인 반도체 산업이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과거사 청산과 관련해 한국·일본 정부 간의 협상에 있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자 1년 동안 수출규제를 계속했다. 그렇지만 한국은 수입처 다각화와 국산화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일본의 수출규제는 오히려 한국 측의 수입국 다변화와 경쟁력 제고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것이다.

일본군의 경복궁 무단점령을 묘사한 판화. 일제가 제작했다.
일본군의 경복궁 무단점령을 묘사한 판화. 일제가 제작했다.

일본은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공세를 펼치고 있다. 일본 마루야마 다쓰야 시마네현 지사는 2020년 7월 일본 정부 측에 독도문제에 강경하게 대응할 것을 촉구하는 요망서를 전달했다. 요망서에는 독도 영유권을 일본이 확립할 수 있도록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참으로 후안무치한 행위이다.

일본 아베총리 등 우익인사들은 ‘한국이 잘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이고 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2020년 6월, 기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체제에 한국 등 4~5개국을 포함시켜 G12 체제로 확대하겠다는 구상을 밝히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여론전을 펼치고 있다. 청와대는 “일본의 몰염치한 태도는 세계 최고 수준”라고 비판했다.

이렇듯 일본은 지난 수천 년의 세월뿐만 아니라 지금에 있어서도 한국을 괴롭히고 있다. 한국이 당면하고 있는 여러 국가과제중의 하나는 극일(克日)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알아야 과거 당했던 수모와 치욕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 대한 경계와 함께 자강(自彊)과 강병(强兵)을 통해 일본보다 더 강성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요구된다.

우리 조상들은 일본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해 국치(國恥)를 당했다. 일본에 대한 국민들의 경계와 주의가 필요하다. 전남 구례 화엄사에는 일본에 대한 경계와 조선의 기운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돌 두꺼비가 있다. 이번 회에는 그 돌 두꺼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두꺼비는 일본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화엄사 돌 두꺼비는 당초 각황전 앞에 놓여 있었다. 화엄사 내부 도량정비가 이뤄지면서 2006년과 2018년에 각각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지리선자 블로그).
화엄사 돌 두꺼비는 당초 각황전 앞에 놓여 있었다. 화엄사 내부 도량정비가 이뤄지면서 2006년과 2018년에 각각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지리선자 블로그).

 

화엄사에 돌 두꺼비가 생긴 이유

전남 구례 화엄사(華嚴寺) 성보박물관 옆에는 돌 두꺼비가 있다. 1t 정도 무게의 돌 두꺼비는 육중한 모습이다. 돌 두꺼비는 남쪽을 향하고 있다. 구례의 남쪽은 광양이다. 마찬가지로 광양의 남쪽은 남해바다인데 그 건너편은 일본이다. 돌 두꺼비가 궁극적으로 향하고 있는 곳은 일본이다. 왜 돌 두꺼비는 일본을 향하고 있으며, 과연 누가 이런 돌 두꺼비를 화엄사에 두었을까?

화엄사 성보박물관 옆에 있는 돌 두꺼비. 일본으로 향하는 기를 억누르고 있다.
화엄사 성보박물관 옆에 있는 돌 두꺼비. 일본으로 향하는 기를 억누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화엄사 스님들은 어떻게 해야 일제의 압제로부터 조선이 벗어날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1942년 포월종삼 스님이 주지스님으로 취임했다. 어느 날. 포월스님을 비롯한 화엄사 스님들은 일본의 패전과 패망을 가져오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진법(眞法)을 사용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스님들은 일본 패망 방안을 강구해 다음날 다시 모이기로 했다.

다음날, 어떤 스님이 화엄사 각황전 앞에 두꺼비 모양의 돌을 배치해 일본의 승(昇)한 기운을 누르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고려 말 우왕 때 왜구들이 섬진강을 따라 올라오던 중 두꺼비들이 다압면 섬진강 마을 부근에서 떼 지어 울고 있는 것을 보고는 두려운 마음이 들어 도망을 갔다’는 설화에서 방책을 찾은 것이었다.

남해 입구의 섬진강. 건너편에 진상역이 보인다.
남해 입구의 섬진강. 건너편에 진상역이 보인다.

‘두꺼비 섬(蟾)’자에 ‘나루 진(津)’을 쓰는 지금의 섬진강 이름은 이런 설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이전의 강 이름은 ‘모래가 많은 강’이라는 뜻의 다사강(多沙江)이었다. 잔인무도한 왜구들이 두꺼비 울음소리에 도망을 갔다는 것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얼핏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그렇지만 전통적으로 일본인들은 두꺼비를 ‘악(惡)의 화신’으로 여겨 매우 두려워했다.

섬거리가 나와있는 교통표지판. 광양시 진상면 섬거리 섬거(蟾居)마을은 고려 때 왜구가 침략하자 두꺼비 떼가 몰려와 마구 울어대 왜구를 물리쳤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섬거리가 나와있는 교통표지판. 광양시 진상면 섬거리 섬거(蟾居)마을은 고려 때 왜구가 침략하자 두꺼비 떼가 몰려와 마구 울어대 왜구를 물리쳤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왜구들은 ‘악귀의 상징’인 두꺼비들이 떼를 지어 울부짖고 있는 모습에 모골이 송연했을 것이다. 사지(死地)로 들어가는 듯해 오싹했음이 분명하다. 공포에 휩싸인 왜구들은 섬진강을 따라 더 거슬러 올라오지 못하고 철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광양·하동사람들에게 두꺼비는 ‘왜구들을 물리친 영험한 동물’로 여겨진 것으로 보인다.

스님은 화엄사 안으로 들어오는 태극기(太極氣)와 지리산 길상봉으로 흐르는 백두기(白頭氣)가 담겨진 돌 두꺼비를 일본 방향으로 두게 해 두 기운이 일본을 억누르게 하면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스님들은 각황전(覺皇殿) 앞에 두꺼비 모양의 돌을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왜구를 물리친 두꺼비들의 울음에서 착안한, 기발한 묘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화엄사 스님들을 주시하고 있는 일본헌병들을 어떻게 속여 넘기느냐는 것이었다. 일본 헌병들은 혹시나 스님들이 일본에 대항해 불온한 일을 할까봐 화엄사 경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주 사소한 일까지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스님들이 돌 두꺼비를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 헌병들이 찾아왔다.

일본 헌병은 “큰 돌을 깎아 무엇을 만들고 있느냐?”고 물었다. 주지스님은 “헌식대(獻食臺)를 만들고 있답니다. 식량이 부족한 탓에 이곳의 스님들도 힘들지만 산사 근처에 살고 있는 새나 다람쥐들은 더 힘들겠지요.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잘 보살피기 위해 이 헌식대를 만들고 있습니다. 불공이나 제사가 끝나고 난 뒤 남은 음식들을 이곳에 넣어두면 산짐승들이 찾아와 잘 먹을 것입니다.”

돌 두꺼비. 화엄사 스님들은 일본 헌병들에게 산짐승들에게 줄 먹이를 담은 헌식대라 속이고 돌 두꺼비를 만들었다.
돌 두꺼비. 화엄사 스님들은 일본 헌병들에게 산짐승들에게 줄 먹이를 담은 헌식대라 속이고 돌 두꺼비를 만들었다.

일본 헌병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화엄사 스님들은 돌로 만든 큰 두꺼비를 각황전 앞에 두었다. 스님들은 큰 두꺼비의 기운이 일본에 미쳐 패망하기를 염원했다. 몇 년 후 일본이 전쟁에 졌다. 조선은 자연스럽게 광복을 맞았다. 광복의 가장 큰 외적 요인은 일제의 패망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조국광복을 위해 숨져간 수많은 독립지사와 조선백성들의 희생이 있었다.

화엄사 돌 두꺼비 역시 조국광복을 염원하는 조선백성과 화엄사 스님들의 열망이 담긴 것이었다. 화엄사 스님들의 항일의지를 담은 돌 두꺼비는 각황전 앞에서 불교대학 건물인 범음료(梵音寮) 옆으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2018년 현 주지스님인 덕문스님이 화엄사 내부를 정비하면서 많은 이들이 돌 두꺼비를 볼 수 있도록 성보박물관 곁으로 옮겨 놓았다.

 

‘덴지쿠 도쿠베 한국 이야기’에 등장하는 두꺼비

앞서 말한 대로 일본 문화 속에서의 두꺼비는 ‘악의 상징’이다.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 이후 조선이 일본을 보복하기 위해 침략할 경우 ‘제3의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고, 나름대로 전쟁준비를 했다. 실제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함경도를 침략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아들 가쓰시게(勝茂)는 3번째의 조선침략을 준비했었다.

조선의 일본침략에 대한 우려와 러시아의 남하에 따른 전쟁위기 속에 1804년 일본 내에서 인기리에 공연된 것이 연극 ‘덴지쿠 도쿠베 한국 이야기’다. 이 연극의 주인공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1차 싸움의 주역인 김시민(金時敏) 진주목사와 그의 아들 덴지쿠 도쿠베이다. 김시민목사와 아들 덴지쿠 도쿠베는 조선의 원한을 갚기 위해 일본과 맞서 싸우는 인물로 나온다.

덴지쿠 도쿠베의 한국이야기 (리안블로그).
덴지쿠 도쿠베의 한국이야기 (리안블로그).

김시민 목사는 임진왜란 당시인 1592년 11월의 제1차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렇지만 이 연극에서는 일본에 대한 조선의 원한을 갚기 위해 일본에 잠입했다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처형당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덴지쿠 도쿠베는 일본과 동남아시아를 오가며 무역을 하던 인물이었으나 자신이 김시민의 아들임을 뒤늦게 안 뒤부터 일본을 적으로 여긴다.

덴지쿠 도쿠베는 자신이 자라난 일본이 실은 아버지를 죽인 적국(敵國)임을 깨닫고 동남 아시아에서 배운 기독교마법을 부리며 일본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 때 덴지쿠 도쿠베가 마법을 부리면서 타고 다니던 동물이 바로 두꺼비다. 두꺼비는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적장이 타고 다니는 흉측스러운 동물로 등장한다. 덴지쿠 도쿠베가 악의 화신임을 부각시키는 장치(裝置)인 것이다.

쓰루야 난보쿠(鶴屋南北:1755년~1829)가 지은 ‘덴지쿠 도쿠베 한국 이야기’가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당시 일본이 조선과 러시아의 침략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은 국가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나라살림이 엉망이었다. 겨우겨우 버텨가고 있었기에 일본에 대한 보복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시베리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에 있는 레자노프의 동상(사진 위키커먼스).
시베리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에 있는 레자노프의 동상(사진 위키커먼스).

조선은 1764년 일본 측의 간청에 따라 통신사를 파견해 일본과의 관계정상화에 나섰으나 무력으로 일본을 응징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렇지만 일본 측 일부 인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일본은 1764년 이후 조선통신사의 일본방문이 끊기고 러시아의 남진(南進)이 계속되자 조선과 러시아가 손을 잡고 일본을 공격할 것이라는 망상(妄想)에 빠졌다.

이런 망상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인 레자노프는 러시아와 북아메리카의 모피무역을 주도하던 상인이었는데, 유럽·아시아·아메리카의 세 대륙 간의 무역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본 개국(開國)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자 1806~1807년 사이에 러시아군을 동원해 사할린 및 쿠릴열도 이투르프(捉)섬에 있는 일본의 군사기지를 공격했다.

이 때 일본 군사기지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약탈해간 조선대포가 있었는데 이 때 러시아 군이 이 조선대포를 다시 약탈해갔다. 이 조선대포는 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아사히신문 2010년 9월 6일자 ‘ロシアに眠る幕府の大砲江戶後期の紛略奪品∇大調査’)

일본 영토가 공격당한 것은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의 고려·몽골 연합군의 일본공격 이후 500여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외국 군대의 침략에 일본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와중에 조선이 임진왜란의 복수를 위해 러시아와 손잡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조·러(朝露)연합군이 일본 서쪽과 동쪽을 동시에 협공할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았다.

1894년 조선으로 출병하는 일본군을 묘사한 판화.
1894년 조선으로 출병하는 일본군을 묘사한 판화.

이 때 하야시 시헤이(林子平)라는 사람이 러시아가 일본을 공격할 것이라며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한 전략서인 ‘해국병담’(海國兵談)을 집필했다. ‘해국병담’에서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전략이 소설형식(軍淡小說)을 빌어 가상으로 제시되는데 이 소설이 ‘북해이담’이다. 북해이담은 조·러(朝露)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한 ‘국방백서 소설’이라 해도 무방하다.

일본의 강성함을 위해서는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요시다 쇼인(야마구치 현 문서관 소장).
일본의 강성함을 위해서는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요시다 쇼인(야마구치 현 문서관 소장).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공연된 가부키 ‘덴지쿠 도쿠베 한국 이야기’는 일본인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조선이 일본을 침략할 가능성이 높다는 가정 아래 상상속의 인물인 (김시민의 아들) 덴지쿠 도쿠베가 일본 멸망을 위해 두꺼비를 타고 마법을 부린다는 이야기는 일본인들에게 극도의 조선경계심과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덴지쿠 도쿠베 한국 이야기’는 1박2일 동안 상연됐다. 희한한 복장을 입은 덴지쿠 도쿠베가 독을 내뿜는 거대한 두꺼비를 타고 무대에 나타나는 장면은 섬뜩했다. 더구나 덴지쿠 도쿠베의 목표는 일본을 멸망시키는 것이었다. 기독교 마법을 사용하면서 일본을 쓰러뜨리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조선인 덴지쿠 도쿠베’의 모습에서 일본인들은 공포심을 느꼈다.

‘덴지쿠 도쿠베 한국 이야기’는 조선에 대한 경계심과 혐오를 불러일으켰다. 이런 경계는 요시다 쇼인 등이 주도해 일본사회에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이 확산되는 배경이 됐다. 그렇지만 조선은 이 같은 일본의 분위기를 전혀 감지 못하고 있었다.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일본 군벌들이 유럽의 신문명을 받아들여 군사력을 키운 뒤 조선정벌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지만 나라의 문을 걸어 잠근(鎖國) 채, 공리공론 속에서 은둔의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호국사찰 구례 화엄사

구례 화엄사는 호국사찰이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 좌군 7천여 명의 병력이 구례·남원성을 점령하고 대살육전을 벌이자 화엄사 스님들은 의승병(義僧兵)이 돼 구례의병들과 힘을 합쳐 왜군과 싸웠다. 왜군들은 구례의병들이 1597년 11월 9일, 연곡에서 남원의병과 함께 연합작전을 펼쳐 왜군 60여명을 죽이고 포로로 잡혀있던 조선양민 200여명을 구출해 가자 대규모 보복전을 계획했다. 1만여 명의 왜군을 동원해 석주관 공격에 나섰다.

멀리서 바라본 석주관성. 영남에서 호남에 이르는 주요 관문이었다.
멀리서 바라본 석주관성. 영남에서 호남에 이르는 주요 관문이었다.

구례 석주관성은 고려 말기에 왜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설치된 진이다. 석주관은 안음의 황석산성, 진안의 웅치, 운봉의 팔량치와 함께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4대 관문 중의 하나였다. 석주관은 구례와 경남을 연결하는 유일한 육상통로였다. 구례 쪽의 지리산에는 진주와 하동 쪽에서 이어지는 조그만 산길이 있었다. 그 길의 관문이 석주관이었다.

그 석주관의 경사진 산허리를 따라 만든 성곽이 바로 석주관성이다. 석주관성은 지리산 왕시루봉으로 이어지는 험한 산줄기여서 성 쪽으로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또 석주관 아래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있어 산 쪽을 제외하고는 공격을 당할 곳이 많지 않았다. 광양만에서 섬진강을 타고 구례 쪽으로 올수는 있었으나 석주관에서 1Km 정도 떨어진 한수내까지만 배가 들어올 수 있어서 결국 도보로 석주관을 통과해야만 했다.

석주관성은 적은 수의 병력으로도 대군을 막아낼 수 있는 천혜의 군사 방어지였다. 현재 남아있는 석주관성 성곽의 길이는 736m이다. 돌로 쌓아 만든 성벽의 높이는 50∼120cm이다. 성벽 중간중간 일정한 간격으로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끔 틈을 만들어놓았다. 고려 때 축조된 산성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라방어사 곽영이 옛 진위에 석주관성을 쌓았다.

구례 의병은 석주관에 진을 치고 왜군과 싸울 것을 결정했다. 화엄사에 격문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화엄사는 의승병 153명과 군량미 103석을 보냈다. 11월 하순에 큰 전투가 벌어졌다. 구례의병들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전투에 나섰다. 석주성 아래 협곡을 사이에 두고 좌우측 산등성이에는 오의사군과 화엄사 의승병이, 산 정상에는 왕의성군이 포진했다.

구례의병은 계곡으로 왜군을 유인해 격렬하게 싸웠다. 그러나 수천 명의 왜군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비통하게도 오의사군과 의승군은 모두 전사했다. 이때 의병과 의승병들의 시체가 골짜기를 뒤덮었다. 화엄사 스님들은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목숨을 바쳐 싸웠다. 나라를 지켜 고통받는 중생들을 편안케 하는 것이 수도자의 본분이라 믿었다.

화엄사 대웅전 뒤 켠에 있는 구시.
화엄사 대웅전 뒤 켠에 있는 구시.
구시. 임진왜란 당시 화엄사 승병들은 구시에 밥을 담아두고 서둘러 밥을 먹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밑이 모두 빠져버렸다.
구시. 임진왜란 당시 화엄사 승병들은 구시에 밥을 담아두고 서둘러 밥을 먹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밑이 모두 빠져버렸다.

화엄사 스님들이 왜군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며 군사훈련을 했던 곳이 화엄사 일주문 일대이다. 모든 사찰에는 일주문이 있다. 일주문에는 문이 없다. 그냥 열려 있는 문이다. 그렇지만 화엄사 일주문에는 특이하게도 문이 있다. 구례군 문화해설사 임세웅씨는 “승병들이 군사훈련을 했던 곳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화엄사 일주문에는 일주문이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도량의 시작’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화엄사가 호국불교의 본산이라는 뜻도 담겨있다. 구례 석주관은 호국의 현장이다. 석주관에서 장렬히 산화한 승병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 흔적이 화엄사 일주문 문짝에 담겨 있는 것이다. 무심코 지나쳐서는 안 될 장소다.

몇 해 전 비교적  상태가 양호했던 구시.
몇 해 전 비교적 상태가 양호했던 구시.

화엄사 대웅전 뒤에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밥을 담아 두었다고 전해지는 7m 길이의 구시가 있다. 이 구시는 지금으로 치면 밥을 담아두었다가 먹는 밥통으로, 많은 승병들이 전투에 참가하기 전에 신속하게 밥을 먹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곳에 밥을 퍼두면 승병들이 제각기 알아서 밥을 담아 먹은 뒤 왜군과 싸움하러 나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석주관(石柱關) 전투

1597년 8월 6일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 좌군 7천여 명의 병력이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구례를 점령하려고 했다. 구례 현감 이원춘은 왜군들이 석주관으로 몰려들자 소수의 병력으로 왜군을 막아낼 수 없다 생각하고 석주관에서 물러나 구례성으로 후퇴했다. 이원춘은 양곡을 비롯, 창고 쌓아둔 물건들을 모두 불태운 뒤 남원성으로 철수했다.

일본은 표착한 포르투칼 선원에게서 조총을 구입해 이를 대량생산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여만 명의 왜군을 조총으로 무장시켜 조선을 침략했다.
일본은 표착한 포르투칼 선원에게서 조총을 구입해 이를 대량생산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여만 명의 왜군을 조총으로 무장시켜 조선을 침략했다.

영남에서 호남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관문인 석주관을 확보한 왜군들은 구례로 몰려들었다. 왜군들은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면서 8월 16일 호남의 마지막 보루인 남원성에 도착했다. 그리고 공격을 시작했다. 남원성에서 관군과 의병을 지휘하던 병사 이복남과 방어사 오응정, 이원춘 구례현감은 결국 전사했다. 성은 함락됐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국민학교(초등학교)역사교과서에 실려있던 조선인 코 수량 확인 모습.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장들이 조선에서 보내온 코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국민학교(초등학교)역사교과서에 실려있던 조선인 코 수량 확인 모습.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장들이 조선에서 보내온 코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다.

왜군의 내륙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던 최후의 성인 남원성이 무너지고 전주성이 왜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전라도의 거의 모든 지역이 왜군천지가 돼버렸다. 왜군의 잔악상은 극치에 달했다.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코를 베고 재물을 약탈하고 집을 불태웠다. 남원성 함락과 더불어 남원·구례·곡성 일대는 전쟁 피해가 극심했다.

왜군들은 전라도를 점령해 가면서 한편으로는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이순신을 죽이기 위해 압박해 들어갔다. 왜군은 남원성 공격에 앞서 깊은 산속을 뒤져 숨어있는 조선백성들을 모두 죽였다. 남원성을 함락시킨 뒤에도 대학살을 자행했다. 왜군들은 조선백성들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죽였다. 그리고 전공을 과시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코를 잘라 일본으로 보냈다.

교토에 있는 코무덤. 정한론자들은 무덤앞에 조선정벌의 의지를 담은 비를 세우고 조선침략의 야욕을 다졌다.
교토에 있는 코무덤. 정한론자들은 무덤앞에 조선정벌의 의지를 담은 비를 세우고 조선침략의 야욕을 다졌다.

그러면서 일부 조선백성들을 포섭해 왜군에 반항하는 이들을 신고토록 하고 상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 왜군들은 자신들에게 반항하는 의병들이 일어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경계심을 늦췄다. 하지만 왜군이 구례를 점령한 뒤 1개월 쯤 지나, 구례지역 사림(士林)들은 왜군을 상대로 의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구례·남원성을 함락시킨 왜군들이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왕득인(王得人)은 장정들을 모집했다. 왕득인은 명종(明宗) 11년(1556) 구례현 남전리(藍田里)에서 태어난 인물로 임진왜란 당시에도 의병에게 군량미를 조달하며 의병들을 지원했다. 50여명이 그와 뜻을 함께 하기위해 달려왔다.

석주관에 있는 칠의사 비. 석주관을 지키다 전사한 이정익·한호성·양응록·고정철·오종·왕득인·왕의성의 가묘와 비가 있다.
석주관에 있는 칠의사 비. 석주관을 지키다 전사한 이정익·한호성·양응록·고정철·오종·왕득인·왕의성의 가묘와 비가 있다.

9월에 왕득인과 의병들은 석주관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왜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괴롭혔다. 왜군은 석주관을 통해 공주까지 진격한 선봉대에게 탄약과 군량미를 보급하려 했으나 석주관 의병들이 이를 가로막자 석주관 공격에 나섰다. 왜장 고니시는 왜군 2천여 명으로 석주관을 공격했다.

의병들은 총을 쏘며 덤벼드는 왜군들을 상대로 용감히 싸웠다. 바윗돌을 굴려 내려 보내면서 대항했다. 그러나 당해낼 수가 없었다. 결국 왕득인과 의병군은 몰살당하고 말았다. 가족들은 왕득인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다. 왕득인 등이 석주관에서 순절 한 후 11월 초 구례에서 2차 의병이 다시 일어났다.

구례군 문화해설사 임세웅씨가 석주관에 세워져 있는 비문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구례군 문화해설사 임세웅씨가 석주관에 세워져 있는 비문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구례읍내 에 살던 20대 젊은 선비들이 주축이 돼 의병을 일으켰다. 이정익·한호성·양응록·고정철·오종 등 이른바 5의사군(五義士軍)이 합세한 의병연합체였다. 여기에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王義成)이 주축이 된 왕의성군(王義成軍)이 합세했다. 아버지의 시신조차 찾지 못한 왕의성은 부친의 원수를 갚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앞장 서 맹렬히 싸웠다.

오의사(五義士)와 왕의성 주변으로 모인 의병 수는 수백 명에 달했다. 5의사 집안의 하인들과 산중에 피난 중이던 백성들이 왜군과 싸우다 죽기를 각오하고 의병이 된 것이다. 사실 당시 상황은 1596년 의병장 김덕령이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은 뒤 끝이었기에 선비들이 의병이 되기를 꺼려하던 때였다. 그런데 구례에서는 유림선비들이 의병에 앞장선 것이다.

당시 구례는 전라도 53개 읍 가운데 가장 읍세(邑勢)가 약했다. 반면에 정유재란 때 왜군들로부터 받은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이다. 읍세가 약하면서도 왜군들의 무차별 살육으로 살아남은 장정들의 수가 별로 없었던 구례에서 500여명 이상의 의병이 일어난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11월 9일 구례 연곡에서 구례의병은 남원의병과 함께 연합작전을 펼쳐 왜군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연곡 전투에서 패한 왜군은 석주관에 있는 의병들을 상대로 대규모 보복전을 계획했다. 왜군은 수천 명의 군사를 동원해 석주관 공격에 나섰다. 구례 의병과 화엄사 의승병(義僧兵) 153명 등 500여명의 의병은 용맹하게 싸웠다.

구례의병은 계곡으로 왜군을 유인해 격렬하게 싸웠다. 그러나 조총사격과 함께 물밀듯 덤벼드는 수천 명의 왜군을 물리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전투가 계속될수록 석주관 골짜기에는 구례의병과 의승병들의 시신이 가득 쌓여갔다. 화엄사 의승병들을 포함한 500여 구례의병들은 결국 모두 순절했다.

돌 두꺼비. 극일(克日)을 위한 역사교육자료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돌 두꺼비. 극일(克日)을 위한 역사교육자료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구례의병의 특징은 구례지역의 선비들과 하인, 피난민, 승려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모두 힘을 합쳤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화엄사 스님들은 호남의병사에서 가장 처절했던 전투중의 하나인 석주관 전투를 치러낸 분들이다. 화엄사 스님들의 이 같은 기개와 호국정신(護國精神)은 나중에도 ‘돌 두꺼비’제작을 통해 그대로 발현됐다. 석주관과 화엄사에 스며있는 스님들의 항일정신을 오늘날에 되새겨보는 것은 의미가 크다.

 

도움말

임세웅

김시덕

구례문화원

 

사진제공

임세웅

화엄사

지리선자

리안(블로그)

구례군

최혁 기자
최혁 기자 hyuckchoi@aitimes.com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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