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의 혼] 불세출의 항일여걸 장흥 여인 이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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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의 혼] 불세출의 항일여걸 장흥 여인 이소사
  • 입력 2020-07-31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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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사 장흥석대들 전투도(조연희화백작품).
이소사 장흥석대들 전투도(조연희화백작품).

장흥에는 유관순 열사를 능가하는 항일여성투사가 있다. 그 여성은 다름 아닌 1894년 동학농민혁명당시 동학군을 이끌고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장흥여인 이소사다. 이소사는 동학농민군을 소탕하려는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장흥 석대들에서 치열하게 싸운 여인이다. 말을 타고 동학농민군을 지휘했던, 용맹스런 여인이었다. 미모 역시 뛰어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관군 기록에 따르면 이소사는 1894년 음력 12월 14일부터 이틀 동안 치러진 장흥 석대들 전투에서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패한 뒤 피신해 있다가 같은 달 27일쯤 소모관 백낙중 진영에 체포된다. 나주감옥으로 이송된 후 뼈가 부스러지는 고문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있다.

그러나 그녀의 최후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일본 신문에도 이소사에 대한 전투기록이 실려 있지만 체포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후속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獄死)했던지, 아니면 형장에서 처형당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에 항거해 목숨을 바친 대표적인 여성 독립 운동가는 유관순 열사이다. 유 열사는 1919년에 일어난 3․1만세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다. 당시 유 열사는 16세의 가녀린 여학생이었지만 서울과 천안 등지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펼치다가 일제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 1920년 9월 28일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3․1만세운동 전개과정에서 7천여 명의 애국지사가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탄압에 희생당했다. 그런데 유관순 열사가 3․1만세운동의 대표적 인물로 떠오르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의 회유에 의해 변절한 이화여고 교장 신봉조와 이화학당 출신 박인덕 때문이다.

신봉조는 일제 말기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로 일했다. 임전대책협의회와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했다. 황도사상을 보급하던 황도학회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이 때문에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기도 했다. 된 친일 인사였다. 박인덕은 3.1독립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렀지만 일제말기에 변절해 친일논설과 강연에 나섰다. 징병을 독려하기도 했다.

장흥석대들 전경.
장흥석대들 전경.

이들이 유관순을 3․1만세운동의 영웅으로 만든 것은 자신들의 친일행적을 희석시키고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의혹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였다. 만약 유관순이라는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유관순을 대신해 이소사가 대표적인 항일여성운동가로 평가받았을 것이다.

전남에 유관순을 능가하는 이소사라는 항일투사가 있었음에도 이를 귀감으로 삼거나 대표적 항일인사로 기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게으름 때문이다. 심청이나 홍길동 같은 전설이나 소설속의 주인공은 부각시키면서도 불세출의 항일투사를 역사의 뒤안길에 묻어두고 있는 것이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일이다.

석대들 장흥농민혁명 기념탑 제막식.
석대들 장흥농민혁명 기념탑 제막식.

 

이소사는 누구인가?

이소사에 대한 기록은 동학농민군 토벌에 나섰던 조선관군 이두황(李斗璜)의 우선봉일기(右先鋒日記)와 동학혁명 당시 일본에서 발행됐던 국민신문(國民新聞)과 조일신문(朝日新聞) 등에 남아있다. 최근 동학혁명사를 연구하고 있는 일부 사학자들 사이에서 몇 명의 동학인물들이 시선을 끌고 있는데 이중 한 명이 바로 여동학(女東學) 이소사(李召史)이다.

소사(召史)라는 명칭은 본래 남편을 잃은 과부(寡婦)를 높여 부르는 존칭이다. 그러나 이소사가 관군에 체포된 후 매에 맞아 온몸의 살이 문드러져 목숨이 거의 끊기자 관군이 남편(金良文)을 수소문해 간호하도록 시도했다는 기록을 참조해보면 과부가 아닌 사람에게도 소사라는 명칭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소사가 끌려간 나주 초토영.
이소사가 끌려간 나주 초토영.

장흥지역의 동학농민혁명사를 연구해온 위의환씨는 여동학 이소사의 존재를 세상에 가장 먼저 알린 문헌으로 정부의 토벌군이었던 이두황(李斗璜)의 우선봉일기를 꼽는다. 이두황이 1895년 1월 1일 일본군 대대장 남소사랑(南小四郞)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져 있다.

“거괴 체포자(이소사)를 나주로 호송이 가능하냐고 했는데, 이 역시 그렇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백성이 처형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미 교령이 오고 있을 때에는 민인이 체포하여 바친 여동학 1명을 소모관 백낙중(白樂中)이 받았습니다.

소모관에게 넘어가 매를 맞는 문초를 당해 살과 가죽이 진창이 돼 있었으며 교령을 받았을때에는 기운과 호흡이 헐떡거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입니다. 조금 늦추는 것을 용인 하여 이에 안정되면 여동학을 본부로 압송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두황은 마음을 바꿔 이소사를 당일 오후 나주로 압송시켜 조사를 받도록 한다. 이소사는 장흥에서 심한 고문을 당해 몸이 심하게 망가졌는데 때문에 나주 일본군 진영에서는 조사를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은 이소사의 남편을 찾아 간호를 하도록 해 이소사의 몸이 어느 정도 나아지면 조사를 하려 했으나 남편 김양문이 이소사를 찾아왔다는 기록은 없다. 또 이후의 이소사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고문의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감옥에서 죽은 것으로 보인다.

 

<갑오의 여인 이소사> 소설 속의 이소사

이소사에 대한 연구는 장흥의 향토사학자 위의환씨를 중심으로 해 펼쳐지고 있다. 최혁 작가는 지난 2014년에 펴낸 <갑오의 여인 이소사>라는 소설에서 이소사의 장흥 석대들 전투 참가 장면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소설에서 주혜로 등장하고 있는 여인이 이소사이다.

장흥향토사학자 위의환.
장흥향토사학자 위의환.

<갑오의 여인 이소사> 소설은 기록에 남아 있는 몇 가지 역사적 사실에 최혁 작가가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더해 것이다. 이소사의 성장 과정과 혼인, 동학군 참여 과정 등이 소설에 담겨져 있지만 사실과는 큰 차이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소설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써졌다. 이소사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자료밖에 남아있지 않기에 이소사라는 불세출의 여걸을 더 깊이 이해하는데 다소나마 도움이 됐을 것이라 믿는다. 다행스럽게도 명금혜정씨 등 여성작가 몇 분이 이소사를 주제로 책을 써내셨고 또 집필준비를 하고 있다.

'갑오의 여인 이소사' 표지.
'갑오의 여인 이소사' 표지.

<갑오의 여인 이소사> 소설 중 이소사의 석대들 전투 장면

일본군 중 가장 빨리 장흥읍에 들어온 부대는 백목성태랑(白木誠太郞) 중위가 지휘하는 부대였다. 이들은 금정면 세류리와 암챙이 골짜기, 보림사를 거쳐 1894년 음력 12월 12일 오후에 장흥에 들어왔다. 능주에서 출발한 일본군 1중대 2소대 병력도 웅치면을 통해 장흥읍으로 들어왔다.

장흥에 들어온 일본군은 12일 저녁 모정등(건산리)에 진을 친 농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농민군 300여명이 맞서 싸웠으나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정예부대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13일 벌어졌던 부내면 남외리 전투에서도 농민군들은 크게 패했다.

12일 저녁에 있었던 건산전투와 13일 새벽에 있었던 남외리 전투, 유앵동(부산면 유량리)전투에서도 농민군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나중에 일본군이 남긴 기록에 보면 각 전투지마다 20~50명의 농민군들이 총에 맞아 숨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 정확한 숫자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들 전투에서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방언 대접주는 안타까웠다. 기관총 등 신식무기를 앞장세운 일본군과 관군, 유생들은 농민군을 토끼몰이 식으로 압박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타개할 수 있는 특별한 묘책이 없었다. 화약은 이미 바닥이 났고 튼튼하게 수비를 할 수 있는 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장흥에 들어와 있는 일본군은 650명, 한양에서 내려온 경군은 240명 정도였다. 조일연합군의 규모는 900여명 정도였다. 농민군은 3만여 명이었다. 나주와 무안, 순천 등 전라도 곳곳의 농민군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숫자는 별의미가 없었다. 일본군이 지니고 있는 기관총은 순식간에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녔다. 또 농민군에게는 큰 약점이 있었다. 싸움에 이기고 있을 때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불리해지면 대열이 급속히 무너졌다. 일단 무너지면 걷잡을 수가 없었다. 중간급 지휘자들이 없는 탓에 뿔뿔이 흩어져 힘을 쓰지 못했다.

이방언 등 농민군 지도부는 이 상태로 가다가는 조일연합군의 포위작전에 말려 농민군들이 전멸당할 것이라는 위기감에 빠졌다. 그래서 정면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농민군들은 장흥 석대들로 모였다. 농민군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농민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기로 결의했다.

14일 새벽, 주혜는 동이 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남편 양문이 무릎을 오그린 채 아직 잠을 자고 있었다. 양문은 얼마 전 말을 타다 떨어져 뼈가 상하는 바람에 몇 달 동안 거동을 하지 못했다.

장성 전투에서 큰 오라비를 잃은 주혜는 며칠 전 장녕성 전투와 병영성 전투에서 아버지와 두명의 오라비를 또 잃었다. 양문은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는 주혜가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석대들로 나서는 주혜를 따라나섰다.

주혜가 용맹스러운 것은 사실이나 이는 어디까지나 맨주먹이나 목검을 가지고 겨루었을 때의 이야기다. 총 앞에서는 장사가 없었다. 그 어떤 천하장사라도 후두두둑 순식간에 수 백 발을 쏴대는 일본군의 기관총에는 당할 길이 없었다.

주혜는 양문에게 석대들로 나오지 마라고 몇 번이고 말했다. 사실 양문은 아직 걸음걸이가 시원치 않았다. 그러나 양문은 만류하는 주혜를 우격다짐으로 누르고 처를 따라 집을 나섰다. 혹시라도 주혜가 다치게 되면 돌보는 일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주혜 역시 그런 양문의 속마음을 헤아리고 있었다.

주혜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이번 싸움에 부부가 같이 있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싸움에 지면 어차피 자신은 죽게 될 것이다. 동학패거리의 남편인 양문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관군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다 죽을 공산이 크다.

주혜는 그래서 석대들로 따라 나오겠다는 양문을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간밤에도 양문은 밤새도록 주혜를 위로했다. 추위에 떠는 주혜의 어깨를 감싸안아주며 눈물을 훔쳐 줬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든 것이다. 주혜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여보, 미안해요. 평범한 여자를 만났더라면 행복하게 살아갔을 사람이…. 팔자가 드센 나를 만나 이렇게 모진 세월을 맞네요”

주혜는 잠들어 있는 남편의 얼굴을 물끄러미 오래 쳐다보았다.

아침 일찍 농민군들이 공격을 개시했다. 일본군들은 석대벌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봉명대와 야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수비하는 일본군들을 농민군이 공격하는 양상으로 전투가 전개됐다. 농민군들이 접근하는 야산 기슭이나 논두렁에는 일본군들이 기관총을 세워두고 무차별로 사격을 해댔다.

농민군들은 수적 우세를 믿고 일본군들을 밀어붙이려 했다. 그러나 앞에서 내달리던 농민군들이 일본군이 쏴대는 기총소사에 허망하게 푹푹 쓰러졌다. 순식간에 수백 명의 시체가 석대벌판에 즐비했다.

농민군들이 도망을 치자 일본군과 경군들이 뒤쫓으며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러 죽였다. 무안과 함평, 순천에서 모여든 농민군들은 석대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기관총을 앞장세운 일본군에 도저히 승산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다음날 석대들에 모인 동학군의 수는 전날에 비해 절반에 불과했다. 주혜는 남문과 석벽 쪽에 자리하고 있는 일본군 기관총을 없애야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기관총을 빼앗아 올수만 있다면 전세를 뒤집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무지막지한 총질을 피해 기관총을 빼앗아 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15일 전투도 농민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농민군들의 희생이 커졌다. 농민군의 기세를 꺾은 일본군과 경군은 산에서 들판으로 내려왔다. 도망가는 농민군들을 무차별 사살했다. 산위에 있던 기관단총 진지도 논두렁 쪽으로 내려왔다.

일본군이 새로 자리를 잡은 기관단총 진지는 주혜가 몸을 숨기고 있는 풀 섶에서 불과 200보 걸음에 있는 곳이었다. 그곳까지만 한달음에 갈 수 있다면 일본군을 죽이고 기관단총을 빼앗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마침 집에서 키우던 말 비호가 포성에 놀라 날뛰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눈에 띠었다. 병영에서 몰고 오던 대포가 논으로 굴러 빠지면서 이를 끌어내기 위해 어제 남편 양문이 집에서 가져온 온 말이었다.

말고삐를 진지 근처 나무에 매달아 두었는데 날뛰면서 풀어진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뛰어오는 비호를 보자 번득 어떤 생각이 스쳤다, 말을 타고 기관단총이 있는 곳까지만 가면 어떻게든 총을 빼앗아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말이 가까이 오자 주혜는 두 팔을 벌려 말을 세웠다. 그 모습을 보고 일본군이 사격을 해댔으나 다행히 맞지 않았다. 주혜는 나무 뒤에 말을 숨기고 말과 함께 호흡을 골랐다. 단숨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잠시라도 말을 쉬게끔 해줘야 했다.

양문은 주혜가 무슨 생각으로 말을 타려는지 알아차렸다. 주혜가 말에 올라타자 마자 양문은 벌떡 몸을 일으켜 주혜의 반대편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일본군들이 자신에게 총을 쏘도록 해 주혜가 기관총 진지에 다가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였다.

아픈 다리를 이끌며 양문은 이를 악물고 뛰었다. 잠깐 뒤돌아 주혜를 보니, 기관총 진지에 가깝게 다가서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던 양문이 총에 다리를 맞고 쓰러졌다. 말을 타고 일본군 기관총 진지만 바라보고 가느라 주혜는 남편이 총에 맞은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침내 주혜가 일본군의 기관단총 진지로 가까이 도착했다. 양문에게 총을 쏘던 일본군들이 순식간에 말을 타고 덮쳐오는 농민군의 모습에 잠깐 당황하는 기색이었지만 주혜에게 총을 겨누고 사격을 하려 했다.

주혜가 일본군 사수 한명에게 손에 든 장검을 던졌다. 장검이 몸통을 뚫었다. 주혜가 몸을 날려 말에서 내렸다. 일본군 대여섯 명과의 거리는 불과 10여보에 불과했다. 총을 쏘기에는 너무 가까웠다.

일본군들이 착검한 총으로 주혜를 찌르려 했다. 주혜는 몸을 비키면서 택견 찍어 차기 발기술로 놈의 얼굴을 강타했다. 동시에 일본군 병사의 몸에서 장검을 빼내 앞뒤 두 명의 일본군 몸통을 베었다.

남은 일본군들이 주춤하면서 어떤 놈은 칼을 빼들고 덤벼들려 했고 어떤 놈은 사격자세를 취하고 총을 쏘려했다. 주혜는 다시 장검을 던져 총을 쏘려던 일본군을 거꾸러뜨렸다. 그때 마침 농민군들이 함성을 지르며 밭둑을 넘어왔다. 남은 일본군들은 농민군들의 칼에 처참히 죽었다.

주혜의 활약은 실로 눈부셨다. 일본군 기관총 진지를 박살내면서 주혜가 지휘하는 농민군들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주혜보다 앞서가던 농민군 부대 100여명은 거의 몰살을 당했다. 다른 쪽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방언 대접주가 후퇴하라는 깃발신호를 보냈다. 주혜는 하는 수없이 다친 농민군들을 수습해 대흥 쪽으로 후퇴했다. 순간, 남편 양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서둘러 아까 양문이 있던 곳을 찾아가 보았으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저쪽에서 누군가를 태운 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남편 양문이었다. 양문의 발목은 으스러져 있었다. 총알이 관통하면서 뼈를 조각내버린 것이다.

정신은 있지만 일어설 수가 없어 너무 고통스러워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그런데 무엇인가 몸을 흔들어대는 것이었다. 비호였다. 가까스로 비호를 올라탔는데 비호는 용케도 주혜가 어디 있는지를 찾아냈다. 양문과 주혜는 비호를 타고 가까스로 석대들을 빠져나왔다.

 

일본신문에 묘사된 이소사

1895년 일본에서 발행되던 국민신문과 조일신문에는 이소사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이 기사에서 이소사는 장흥부 전투를 할 때 말을 타고 동학군을 지휘했던 여전사로 소개되고 있다. 게다가 22살의 빼어난 용모를 지닌 여인으로 묘사하면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다음은 이소사에 관한 국민신문 1895년 3월 5일자 신문기사.(천도교 장흥교구와 장흥군이 펴낸 장흥동학농민혁명 사료총서 2권 중에서 발췌)

“동학당에 여장부가 있다. 동학당의 무리 중에 한 명의 미인이 있는데 나이는 꽃다운 22세로 용모는 빼어나기가 경성지색(傾城之色)의 미인이라 하고 이름은 이소사라 한다.

오랫동안 동학도로 활동하였으며 말을 타고 장흥부가 불타고 함락될 때 그녀는 말위에서 지휘를 했다고 한다.

일찍이 꿈에 천신(天神)이 나타나 오래된 제기(祭器)를 주었다고 하여 동학도가 모두 존경하는 신녀(神女)가 되었다. 그러나 장흥전투의 패배로 관군에 체포돼 지금은 장흥의 철창 안에 있다고 한다”

또 조일신문 1895년 4월 7일자에는 아래와 같은 이소사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다.

1909년 촬영된 일본 헌병대 장흥분견소 사진.
1909년 촬영된 일본 헌병대 장흥분견소 사진.

“장흥부근의 동학도 무리에는 한 명의 여자가 있는데 추천으로 수령이 됐다. 우리 병사가 잡아서 심문을 했는데 완전히 미치광이가 됐다. 동학도가 귀신을 이야기하고 신을 말하는 것을 이용하여 천사 혹은 천녀라 칭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선동했다”

송기숙교수는 ‘장흥지역 동학농민전쟁 관계구전조사’를 1990년 5월 남풍출판사에서 발행한 ‘역사와 현장’에 실으면서 이소사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당시 일본 조일신문에 장흥에서 이소사란 여자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짤막하게 보도된 사실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여러 사람에게 물어봐도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중략) 이가(李哥)라면 이방언장군의 집안 여자가 아닐까 싶으나 그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것이 사실이라며 우리나라 여성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일일 것이다”

 

이소사는 어떤 활동을 했을까

1975년 4월 발간된 장흥군향토지는 동학과 관련된 글에서 이소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소사란 여인이 앞장서서 동학군의 사기를 진작시켜 큰 전과를 거두었다고 당시 일본의 조일신문에 기록돼 있으나 여타 동학관계기록이 없어 안타깝다. 확인된다면 3.1일 운동 때의 유관순처럼 한국여성운동의 선구자로 부상될 것이다”

말을 타고 동학군을 지휘했다는 기사가 나오지만 더 이상의 자료가 없기에 이소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었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소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추론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사실들이 있다.

위의환씨는 장흥동학농민혁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인환대흥대접주와 이소사가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위씨는 이 근거로 ‘우선봉일기 박헌양부사의 순절편’에서 이소사의 거처가 장흥부에서 40리라는 지적을 들고 있다.

장흥동헌근경 (1900년대 초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장흥동헌근경 (1900년대 초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장흥경찰서 뒤쪽 일대가 장흥관아가 있던 곳이다.
장흥경찰서 뒤쪽 일대가 장흥관아가 있던 곳이다.
1900년대 초 쵤영된 장흥아문. 군청건물로 사용됐다.
1900년대 초 쵤영된 장흥아문. 군청건물로 사용됐다.

위씨는 이소사가 이인환대접주와 가까운 거리에서 살고 있었다면 동학군이 장녕성(장흥)을 함락시킬 때 수성군을 상대로 싸움을 같이 치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남소사랑이 쓴 토벌기록인 ‘동학당정토약기’ 중에는 “부사의 목을 내친 사람이 여동학(이소사)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대목이 있어서이다.

남소사랑이 모진 고문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이소사를 일본 군의관으로 하여금 치료를 하게하고 또 장흥에서 남편 김양문을 찾아 나주로 보내라고 지시한 것은 어떻게라도 이소사를 소생시켜 그녀가 직접 부사를 죽였는지, 그리고 장흥동학농민혁명 지도부와 어떤 관계였는지를 직접 조사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위의환씨의 생각이다.

이런 모든 측면을 감안해 볼 때 여성인 이소사는 동학농민혁명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항일운동에 있어서 여성운동의 선구자이다. 이소사에 대한 자료를 찾기가 매우 힘들지만 후학들의 끊이지 않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와 자료조사가 있을 때 언젠가는 우리 앞에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2009년 장흥동학농민혁명 기념식에서 나부끼던 이소사 깃발.
2009년 장흥동학농민혁명 기념식에서 나부끼던 이소사 깃발.

이소사라는 여인은 언젠가 우리 곁에 남도의 대표적 항일애국여성으로서, 또한 농민군을 이끌고 관군․일본군과 맞서 싸우던 영웅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우리는 일제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선인들의 자취를 찾아내는 일에 너무도 소홀하고 있다. 이 소사라는 여인을 기억하고 그 불굴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 극일의 구체적인 방법 중의 하나일 것이다.

 

사진제공

남성진

 

그림

조연희

 

자료 및 사진제공

양기수

위의환

장모창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최혁 기자
최혁 기자 hyuckchoi@aitimes.com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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