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멋] 정도전과 조선개국의 토양을 제공한 유배지 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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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멋] 정도전과 조선개국의 토양을 제공한 유배지 나주
  • 입력 2020-08-13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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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룡산 아래에 있는 정도전 유배지 터에 세워진 초가.
백룡산 아래에 있는 정도전 유배지 터에 세워진 초가.
정도전 유배지의 초가.
정도전 유배지의 초가.
다시 삼거리의 정도전 유배지 안내판.
다시 삼거리의 정도전 유배지 안내판.

 

나주로 귀양 온 정도전

전남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에는 고려 말이었던 1375년,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이 유배와 3년 동안 살았던 집터가 있다. 국도 1호선에 있는 다시면 소재지 삼거리에서 동쪽으로 꺾어 1.6Km쯤 들어가면 백동저수지가 나온다. 백동저수지 아래에 백동(白洞)마을이 있다. 마을 입구에 ‘백룡산하 백동마을’(白龍山下 白洞마을)이라 쓰인 마을비가 세워져 있다. 유배를 살았던 집터는 마을을 오른쪽으로 끼고 900여m농로를 따라 올라가면 자리하고 있다.

백동마을 입구의 정도전 유배지 안내판.
백동마을 입구의 정도전 유배지 안내판.

정도전이 유배를 왔던 백동마을은 고려 당시에는 회진현(會津縣) 소재동(消災洞)이라 불리던 곳이다. 소재동은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속해 있던 한 촌락이었다. 거평부곡은 농사를 생업으로 삼던 양민들이 살던 곳으로, 다양한 성씨(姓氏)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지금까지 부곡(部曲)은 ‘천민들의 집단취락’이라고 인식돼 왔지만 최근에는 ‘개방적인 자연촌락’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소재동은 농사짓는 사람과 장인들이 모여 살던 자연부락이었다.

백동마을 표지석.
백동마을 표지석.

소재동은 정도전이 백성들의 비참했던 삶을 목도하면서 ‘현실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곳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관리로 ‘잘 나가던 삶’을 살던 정도전은 소재동으로 귀양 오면서 나락(奈落)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구가세족(舊家世族:권문세도가)들의 횡포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농민들의 따뜻함과 지혜로움도 함께 느낀다. 나라의 현실을 바로 보는 한편 백성들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고려를 망하게 한 구가세족들의 땅 욕심

후에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다. 정도전은 고려의 토지제도를 혁신적으로 개혁한다. 고려는 구가세족들의 ‘땅에 대한 탐욕’ 때문에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구들의 침략과 준동이 고려멸망의 외적요인이라면, 60여 구가세족 가문들이 고려의 모든 토지를 움켜쥐고 나라의 부를 독차지한 것이 고려를 붕괴시킨 내적요인이었다. 양민들은 수탈과 부역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구가세족들의 노비(壓良爲賤:양민을 못살게 굴어 천민으로 만듬)가 됐고, 나라재정은 갈수록 고갈됐다.

구가세족은 군인에게 지급하는 군인전(軍人田)까지 자기 땅으로 먹어치웠다. 고려는 군역자(軍役者)들에게 군인전을 주고, 그 대신 나라가 위급할 때는 전쟁터로 나가 싸우도록 했다. 그런데 군인전이 권문세도가들의 수중으로 모두 들어가 버리니, 군역자들에게 줄 군인전이 사라져버렸다. 중앙 정규군을 지탱할 제도적 장치가 붕괴된 것이다. 그래서 고려조정은 왜구나 홍건적이 쳐들어오면 임시로 청장년들을 징발해 싸우도록 했다.

고려는 소수의 권력자들이 나라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고 있던 나라였다. 원나라가 고려를 지배하던 때에는 원에 붙어 권력을 휘두르던 부원배(附元輩)들이 농민들로부터 넓은 땅들을 빼앗아 자신들의 농장(農莊)으로 삼았다. 고려 말로 갈수록 상황은 심각해졌다. 1품의 벼슬아치들도 토지를 받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다. 권문세도가들은 세금이나 부역을 내지 않았으니, 세도가들은 갈수록 부자가 됐으다. 자연, 나라는 가난해졌다.

정도전은 귀양살이를 하던 회진현 소재동에서 고려의 참담한 현실을 목격했다. 그리고 구가세족들이 독차지하고 있는 땅을 백성들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구가세족들의 권력은 너무도 막강했다. 점진적인 개혁이나 조치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세상을 뒤엎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모든 땅을 나라 것으로 한 뒤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일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소재동에서 움튼 정도전의 개혁의지는 귀양살이 9년 동안 더 명료해지고 구체화된다. 소재동에서 3년 귀양살이를 한 정도전은 우왕 3년(1377년) 귀양지가 종편거처(從便居處:서울을 제외하고 원하는 곳에서 살게 하는 것)로 바뀜에 따라 고향 영주(榮州)로 돌아간다. 그러나 왜구들의 침입으로 피난을 다니다가 삼각산 아래에 둥지를 튼다. 그는 이곳에 삼봉재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정도전을 미워하는 정적들이 삼봉재를 헐어버리고 핍박했다.

정도전은 거처를 부평으로 옮겼으나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는 1382년 다시 김포로 이사했다. 그의 나이 만 마흔 살 때였다. 소재동 유배생활에서 형성된 개혁의지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단단해졌다. 도탄에 빠진 백성과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면 무엇인가 일을 벌여야 했다. 그 자신 역시 더 이상 고단한 삶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1383년(우왕 9년)승부수를 던진다. 군사를 움직일 수 있는 이성계를 찾아 함길도 함주로 간 것이다.

 

정도전과 유배지 백동마을 사람들

정도전의 유배지는 나주목 회진현 소재동이었다. 정도전은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정도전은 이곳 마을사람들이 사대부 못지않게 냉철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연히 들에서 만난 늙은 농부 역시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무지렁이 취급을 받으며 구가세족들에게 억압받고 수탈당하고 있지만 그들이야말로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삼봉집'은 태조 6년(1397) 때 처음 간행되고, 이후 세조 11년(1465), 성종 17년(1486), 정조 14년(1790) 등 여러 차례 재 간행된 정도전의 문집이다. 조선의 건국 이념과 정도전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삼봉집'은 태조 6년(1397) 때 처음 간행되고, 이후 세조 11년(1465), 성종 17년(1486), 정조 14년(1790) 등 여러 차례 재 간행된 정도전의 문집이다. 조선의 건국 이념과 정도전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정도전은 <삼봉집>에 실린 <소재동기>라는 글에서 집주인 황연에 대해 이렇게 썼다.

‘동리 사람들은 순박하고 허영심이 없다. 힘써 농사짓기를 업으로 삼고 있다. 동리사람들 중 황연은 더욱 그러했다. 그의 집에서는 술을 잘 빚고 황연이 또 술 마시기를 좋아했다. 술이 익으면 반드시 나를 먼저 청해 함께 마셨다. 손님이 오면 언제나 술을 내어 대접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공손했다.’

또 마을 사람 서안길에 대해서는 이렇게 묘사했다.

‘서안길이라는 자는 늙어서 중이 되었기 때문에 안심(安心)이라고 불렀다. 코가 높고 얼굴이 길어 용모와 행동이 괴이했는데, 모든 사투리, 속담, 여항(閭鄕;저자거리)의 일 등 모르는 것이 없었다.’ 들에서 만난 노인은 정도전이 귀양 오게 된 경위를 묻다가 정도전의 격한 성격과 때를 기다리지 않고 쉽게 준동하는 태도를 지적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답전부>에는 늙은 농부가 정도전에게 귀양 온 이유를 여러 차례 물어보다가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묻는 내용이 나와 있다.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하면서 헛된 명예를 훔치고 어두운 밤에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온갖 지저분한 짓거리를 다하다가 공론이 비등하고 천도(天道)가 무심하지 않아 그만 간사한 짓이 드러나고 죄가 발각되어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인가?” 정도전은 그것도 아니라고 답했다. 그러자 늙은 농부는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나는 그대의 죄목을 알겠도다. 그 힘이 부족한 것을 헤아리지 않고 큰 소리를 좋아하고, 그 때의 불가함을 알지 못하고 바른말을 좋아하며, 지금 세상에 났지만 옛 사람을 사모하며,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위를 거스른 것이 죄를 얻은 원인이로다.”

들에서 만나 농부가 한 이야기에는 상당히 심오한 역사적 배경이 담겨있다. 현실의 모순과 문제를 극복할 방안을 강구해야지, 예전의 좋았던 시절만 이야기하며 현재의 임금과 권력자들을 무조건 비판하면 안 된다는 은근한 힐책이 포함돼 있는 것이다. 늙은 농부의 말에 대해 역사학자 이덕일은 그의 저서 <정도전과 그의 시대>에서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농부가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노자(老子), 즉 도가(道家)계통 사람들이 유학자를 비난하는 말입니다. 지금 세상에 났지만 옛사람을 사모한다는 것은 유학자들이 하·은·주 삼대(三代)를 이상사회로 삼아놓고 지금의 현실정치를 비판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분서갱유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정도전은 소재동에서 생활하면서 목도한 농촌의 현실과 체험을 바탕으로 해 <금남잡영>(錦南雜詠),<금남잡제>(錦南雜題)등을 남겼다. 또<심문천답>(心問天答),<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와 같은 성리학 관계저서, <8진36변도보>(8陣36變道譜),<태을72국도>(太乙72局圖)등의 저서도 소재동에서 구상했다. <참조: 내고향 나주 14호, 도올 김용옥의 소재동기>

 

소재동 초막처럼 어그러진 정도전의 삶

백룡산 정산으로 가는 길.
백룡산 정산으로 가는 길.
정식장군 신도비와 유배지에 세워져 있는 초가.
정식장군 신도비와 유배지에 세워져 있는 초가.

황연의 집에서 곁방살이를 하던 정도전은 동네 뒤쪽 산 아래에 조그만 집을 짓게 됐다. 집터는 백룡산 아래쪽 양지받이였다. 백동마을과는 좀 떨어진 곳이었지만 산에 오르기 좋고 전망도 좋은 곳이었다. 묵은 숲의 나무들을 잘라내고 땅을 골랐다. 방과 마루, 두 칸짜리 띠집이었기에 큰 공사는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달라붙어 며칠을 뚝딱뚝딱 나무를 세우고, 볏짚에 진흙을 섞어 벽을 바르니 집 한 칸이 생겨났다.

정도전은 이 초가집(草舍)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이엉 끝을 자르지 않아 초가지붕은 볼 품 없고/ 흙을 쌓아 뜰 만드니 모양새는 비뚤비뚤

깃든 새는 슬기로워 저 자는 곳 찾아오는데/ 들사람 놀래 뉘 집이냐 물어보네.

맑은 계곡물은 유유자적 문 앞에 굽어 흐르고/ 푸른 숲은 영롱하게 문을 가렸구나.

집 밖으로 나가보면 산천은 다른 곳 같은데/ 문 닫고 돌아앉으면 옛 생활 그대로구나.’

 

백동마을 소나무.
백동마을 소나무.

백동마을 소나무들은 정도전이 <초사>에서 읊었던 '새들이 찾아들던 그 소나무'가 아니다. 백동마을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20여 그루 소나무들은 사실 '비보숲쟁이'다. 백룡산의 형세를 안은 백동마을은 소쿠리 형상이다. 그래서 앞이 허하다. 백동마을 저멀리 맞은 편에는 월출산아 자리하고 있다. 월출산의 흰바위들은 화기를 품고 있어서 마을이 불기운에 휩싸일 소지가 많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남쪽의 기를 보충하기 위해 마을 입구에 소나무를 심었다. 정도전이 살았던 때보다 훨씬 뒤에 심어진 소나무들이지만, 소나무들의 품으로 내려앉는 새들을 보니 정도전의 바라보던 '그 소나무와 그 새들'이 절로 생각난다.

초가에서 바라본 유배지 앞 풍경. 정도전이 유배 와 있을 당시에도 집앞에는 논풍경이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초가에서 바라본 유배지 앞 풍경. 정도전이 유배 와 있을 당시에도 집앞에는 논풍경이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초사>에는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 사이에서 고뇌하는 정도전의 심리가 노출돼 있다. 현실은 초라하지만 정도전이 품었던 이상과 야망은 여전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한편 이 시에서 정도전은 귀양살이 하는 초가집에서 안분지족(安分知足)을 느끼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초가집이지만 귀양살이 중에도 추위와 더위에 몸을 피할 집이 있으니 그만하면 족하다’ 싶은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막상 ‘문 닫고 돌아앉을 때’나 ‘자리에 누울 때’면 회한이 엄습했을 것이다. 왕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탄핵을 배후조종한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 친원(親元) 대신들에 대한 복수심이 끓어올랐을 것이다. 성균관 박사 등 고위관리로 근무하는 동안 자신의 곁에서 맴돌던 그 많은 관리들과 친구들이 발길을 끊어버렸으니 배신감에 통분했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아내가 보내온 편지는 정도전의 가슴을 후벼 팠다. 정도전은 <가난>이라는 글에서 아내가 보내온 편지의 내용과 자신의 답변을 소개하며 어려웠던 세월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정도전의 아내가 보낸 편지는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했다. ‘언젠가는 입신양명해 처자들이 의지하고 집안에는 영광을 가져오리라 기대했는데 겨우 유배에 가 있는 신세냐?’는 힐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에 그 많던 친구들은 지금 모두 어디 갔느냐?’고도 따졌다.

정도전은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당신의 말이 모두 맞소. 예전의 내 친구들은 정이 형제보다 깊었는데, 내가 패한 것을 보더니 뜬구름처럼 흩어졌으니, 그들이 나를 근심하지 않은 것은 본래 세력으로 맺어졌지 은혜로 맺어지지 않은 까닭이오.’

소재동비.
소재동비.

정도전은 소재동 초막에서 현실에 눈을 떴다. 실천력이 없는 성리학은 헛된 학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백성을 위한다는 정치가 실은 권력자들만을 위한 정치라는 것도 절감했다. 힘이 없으면 아무 것도 개혁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은 무력했다. 언제 귀양이 풀릴 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자신을 뒤덮고 있는 이 압제가 언제 깨질지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꿈을 잃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관직에 오르면 기필코 힘을 길러 이 불합리한 세상을 바꿔놓고야 말 것이라 다짐했다. 그러기위해서는 살아남아야 했다. 정도전의 마음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스며있다. 정도전은 이렇게 썼다. ‘영욕과 득실은 하늘이 정한 것이지 사람에게 난 것이 아니니 그 무엇을 근심하겠오?’ 실은 그 위로의 말은 자신에게 한 위로였다. 정도전은 입술을 깨물며,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귀양살이의 고통을 견뎌냈다.

삼봉 정도전 선생 유적비.
삼봉 정도전 선생 유적비.
봉화 정씨 가문 사람들이 나주 정씨 가문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준 정식장군 신도비.
봉화 정씨 가문 사람들이 나주 정씨 가문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준 정식장군 신도비.

 

소재동 정도전 유배지

지금의 운봉리(소재동)에는 지난 2006년에 세운 초막 하나가 외롭게 자리하고 있다. 그 주변에는 삼봉 정도전 선생 유적비, 소재동 비, 봉화 정씨 가문에서 세운 정식(鄭軾)장군 신도비 등이 있다. 소재동비는 2001년에, 유적비와 정식장군 신도비 등은 2006년에 각각 세워졌다. 초막은 방 한 칸에, 마루 한 칸인 아주 단촐한 구조다. 집 앞에는 얼기설기 나무들을 묶어 경계를 지어두었다. 조금은 어줍은 풍경이다.

구멍 뚫린 창호문 앞에 고무신 한켤레가 놓여 있다. 작위적이어서 어울리지가 않다.
구멍 뚫린 창호문 앞에 고무신 한켤레가 놓여 있다. 작위적이어서 어울리지가 않다.

귀양살이 집인데, 나뭇가지로 만든 담일지라도 무슨 담이 필요하겠는가? 방 앞 댓돌 앞에는 생뚱맞게 고무신 한 짝이 놓여 있다. 짚신 대신 놓아둔 것이라 생각되는데, 640여 년 전의 귀양살이 집 풍경을 떠올려보는데 방해만 되는 소도구(小道具)다. 문의 창호지는 곳곳에 구멍이 뚫려있어 스산함을 더해주고 있다. 옛 집의 분위기를 내기위해 창호문을 설치한 것은 가상한 일이다. 하지만 관리하는 손길이 뒤따르지 않아 흉가(凶家)같은 모습이 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나주정씨 세장산과 초가. 나주 정씨 가문은 정도전의 가문인 봉화 정씨 사람들에게 유배지 일대 200여평을 평생 임대했다. 그 고마움에 답하고자 봉화 정씨 사람들은 나주 정씨 가문 사람인 정식장군 신도비를 세워주었다.
정도전 유배지 풍경. 초사와 정도전 선생 유적비, 소재동비가 자리하고 있다.왼쪽이 나주 정씨 세장산이다.
나주정씨 세장산과 초가. 나주 정씨 가문은 정도전의 가문인 봉화 정씨 사람들에게 유배지 일대 200여평을 평생 임대했다. 그 고마움에 답하고자 봉화 정씨 사람들은 나주 정씨 가문 사람인 정식장군 신도비를 세워주었다.
나주정씨 세장산과 초가. 나주 정씨 가문은 정도전의 가문인 봉화 정씨 사람들에게 유배지 일대 200여평을 평생 임대했다. 그 고마움에 답하고자 봉화 정씨 사람들은 나주 정씨 가문 사람인 정식장군 신도비를 세워주었다.

정도전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1996년 11월 24일부터 1998년 5월 31일까지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일기 시작했다.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을 중심으로 해 펼쳐진 대하사극에서 정도전은 극중 주요 인물로 등장해 시선을 끌었다. 몇 해 뒤 KBS 1TV는 정도전이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춘 사극 <정도전>(鄭道傳)을 2014년에 방영했다.

정도전에 대한 관심은 사극 <용의 눈물>이 계기가 돼 높아졌다. 덩달아 정도전의 유배지였던 나주 백동마을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백동마을 정도전 유배지에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기념사업의 필요성이 커지자 유배지 일대의 땅을 소유하고 있던 나주 정씨 가문에서 200평의 땅을 봉화 정씨 가문에 영구 임대했다. 이에 봉화 정씨 가문에서는 나주 정씨 세장산(世葬山)옆 정도전 유배지에 나주 정씨 출신인 정식장군의 신도비를 세워 은혜에 보답했다.

나주 정씨 가문의 정식장군은 고려 고종과 충렬왕 때 활약한 정가신(鄭可臣)의 5세손이다. 세종 때 예조좌랑과 이조정랑을 지냈다. 의주성 축성을 감독하였고 세조 때는 함길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여진족 등 야인을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후에 병조참판이 돼 조선 초기 군사제도를 확립했다. 벼슬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봉화 정씨 가문은 나주 정씨들이 정도전 유배지 땅을 제공해준 후의(厚意)에 대해 정식장군의 신도비를 세워줌으로써 보답한 것이다.

나주시는 백동마을 정도전 유배지(草舍)로 들어서는 입구에 정도전 지난 2005년 신소재동기(新消災洞記)를 세우고 정도전의 개혁사상이 소재동에서 움트고 커갔음을 적시했다. 신소재동기는 정도전의 개혁사상이 소재동에서 형성됐다고 주장하는 도올(檮杌) 김용옥(金容沃) 교수가 작성했다. 김교수는 2005년 나주읍성동점문복원기(羅州邑城東漸門復元記)를 작성하면서 1375년 정도전이 나주의 원로들에게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힘써줄 것을 당부한 글(登羅州東樓諭父老書 錦南雜題)을 언급하기도 했다.

백동마을 정도전 유배지로 가는 길목에 있는 '신소재동기'. 유배지 초가 앞에는 이미 2001년에 세워진 '소재동기'가 있다. 그래서 2005년에 도올 김용옥 교수가 새로 글을 쓰면서 '신소재동기'라 했다.
백동마을 정도전 유배지로 가는 길목에 있는 '신소재동기'. 유배지 초가 앞에는 이미 2001년에 세워진 '소재동기'가 있다. 그래서 2005년에 도올 김용옥 교수가 새로 글을 쓰면서 '신소재동기'라 했다.

도올 김용옥 교수가 쓴 <신소재동기>는 정도전의 일생과 개혁사상, 조선개국의 공적 등을 헤아릴 수 있는 글이기에 전문을 실어본다.

‘여기 소재동이라는 곳은 고려 말에 성립한 문헌에 의하여 그 주민의 생활상을 소상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지명에 해당되는 위치가 정확하게 비정되는 보기 드문 우리 역사의 소중한 유적이다. 여말 문헌이라 함은 바로 조선왕조 개창자라고 할 수 있는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이곳에 유배되어 와서 쓴 <소재동기>(消災洞記)를 말하는 것이다. 그 외로도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는 <답전부>(答田父), <가난>(家難),<금남야인>(錦南野人)등의 치열한 산문과 기타 시문이 전하고 있다.

소재동이라는 이름은 이곳 산허리에 소재사(消災寺)라는 절이 있어 유래된 것인데, 소재란 재난을 예방하거나 물리치기 위하여 부적을 태우고 경을 읽는 제식을 말한다. 동북으로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이 단중기위(端重奇偉)하고, 동남으로 월출산이 청수돌올(淸秀突兀)하며, 금강(錦江)이 나주의 동남을 에워싸 흘러 회진현(會津縣)의 남서를 지나 바다로 들어가는데 산세의 아지랑이와 바다의 장기로 감기가 들 때도 있지만, 아침저녁의 천화 만변하는 기상이 아름답기 그지없고 그 소쇄청한(瀟灑淸寒)한 모습이 사람의 마음을 안락케 한다. 주민들은 순박하기 그지없고 바깥세계에 대한 허영심이 없이 오로지 농사짓기에 힘쓰며, 풍요로워 술 먹기를 즐긴다 하였다.

소재동은 나주의 속현인 회진현이 관할하는 거평부곡(居平部曲)의 한 촌락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소재동기>에 나타난 사람들의 생활상의 연구를 통하여, 부곡이 특정한 기술이나 직업을 가진 천민들의 집단취락이라는 기존의 통념이 깨지고, 그것은 단순한 군현제의 하부구조를 이루는 행정단위로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部曲人)은 농업을 위주로 하는 양민들이며 다양한 성씨로 이뤄져 있는 개방적 자연촌락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단지 역사적으로 부곡으로 분류된 지역은 고려 태조의 왕업창건에 협조하지 아니한 호족세력들이 편성된 곳이라서 어느 정도 불리한 제약이 있었다고 간주된다. 부곡리(部曲吏)는 5품 이상의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정도전은 본시 경상도 봉화(奉化) 사람이지만 경세로서의 치국방략의 대강은 바로 이곳 유배생활에서 기층농민들의 순진무구하면서도 놀라웁게 비판적인 삶을 몸소 체험하면서 형성되어 간 것이다. 그 핵심은 맹자의 민본사상과 혁명사상을 조선민중의 삶 속에 체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실천을 모르는 지식인의 박학이 얼마나 무서운 허위인가를 깨달았다. <가난>에 실린 부인의 편지는 삼봉의 실존적 고독을 절절하게 전해주고 있고 <답전부>는 초야에 묻혀 사는 한 농부현자의 서릿발과도 같은 비판적 예지를 신랄한 문학으로 표현하고 있다. 삼봉이야말로 경상·전라 양 날개의 기를 결집하여 경기(京畿)와 온누리의 몸체를 혁신한 혁명가요 대 사상가라 할 것이다. 공민왕이 시해되면서 성리학을 수용한 신흥사대부들의 개혁정치가 좌절되고, 다시 보수 세력이 고개를 쳐들면서 시대의 조류를 역행하는 무모한 친원반명(親元反明)의 외교정책이 수립된다. 정도전은 원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영접사로 임명되자 “사신을 접대하느니 차라리 그놈의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그 직책을 단호히 거절하고 이곳으로 유배되어 온 것이다. 삼봉은 34세로부터 36세에 이르기까지 이 곳 소재동에서 세 해를 머물렀다. 이곳에 와서 풀도 베지 않고 나무도 깎지 않은 채 흙을 쌓아 마당을 만들고 갈대를 엮어 울타리를 만들고 두 칸 초가집을 지었는데, 일이 간략하고 힘이 적게 드는데도 동리사람들이 와서 도와주어 며칠이 못되어 완성되었다. 편액을 그냥 단촐하게 초사(草舍)라 하였다. 시인 두보는 성도(成都)에 있을 때 초당을 짓고 산 것이 겨우 한해를 지냈을 뿐인데 그 이름은 천년을 전한다. 삼봉이 말하기를, 내가 이곳을 떠나면 이 초사는 비바람을 맞고 들불에 타서 썩어 흙덩어리가 되어 후세에 과연 그 이름이 남을지 모를 일이라 하였다.

나 도올이 말한다. 삼봉의 초사는 두자미(杜子美, 두보의 자)의 초당보다 더 길이 청사에 남으리라. 그가 전하는 것은 초사의 이름이 아니요, 조선왕조를 일관한 민본(民本)사상이요, 인민의 삶과 정신을 혁신한 토지개혁, 종교개혁 등의 영구혁명론이다. 그 사상이 동학, 의병, 독립운동, 광주민중항쟁을 거쳐 오늘 우리사회의 개혁정신에까지 이르고 있으니 이곳 소재동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끊임없는 혁명의 샘물이다.

2005년 을유 가을 도올(檮杌) 김용옥(金容沃) 쓰다.’

나주 동점문.
나주 동점문.
2006년에 복원된 동점문.
2006년에 복원된 동점문.

도올 김용옥이 ‘정도전이 유배지 회진현 소재동에서 경세로서의 치국방략 대강을 형성했다’고 밝힌 것은 일찍이 정도전이 <등나주동루유부노서 금남잡제>(登羅州東樓諭父老書 錦南雜題)에서 왜구에 대비해 여러 계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한 것을 의미한다. 정도전은 1375년 동루(지금의 동점문)에서 나주의 지도층 인사들에게 강포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지혜를 모아줄 것을 호소했다.

<등나주동루유부노서>에 나오는 정도전의 ‘왜구에 대한 경계와 방비’에 대한 글 대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김용옥 교수 번역문)

‘도전이 인사로 재상에게 거슬려서 회진현으로 추방되어 왔다. 회진현은 나주의 속현이므로 나주를 거치게 되어 동루에 오르게 된 것이다. 배회하면 사방을 바라보니 산천이 아름답고 인물이 부서(富庶)*하매 남방의 일대 거진(巨鎭)이다. (중략)

이 고을은 바다와 인접하고 있어서 극히 변두리이며 멀다. 그래서 근심되는 것이 왜구보다 더한 것이 없다. 연해한 다른 고을들은 혹 포로가 되거나 혹 이사를 가서 소연히 사람이 없으므로 토지를 지키고 공부(貢賦)를 받치지 못한다. 그들이 판적(版籍)에 기재된 호적, 사람이 휴식하는 집과 재부가 나오는 토지 등을 모두 초목이 번성한 곳이나 여우 토끼가 사는 굴같이 내버리고 유산하다가 사망하는 것을 모두 아랑곳하지 않는 것은 모두 왜 때문이다.(후략)’

*富庶:재물이 많고 넉넉하다는 뜻

정도전 초상.
정도전 초상.

 

정도전과 이성계의 조선개국, 그리고 정도전의 최후

정도전은 9년간에 걸친 유배생활을 청산하고 1383년 가을, 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李成桂)를 함주 막사로 찾아간다. 이성계는 정도전의 그릇됨을 알아보고 ‘끈 떨어진 별 볼일 없는 벼슬아치’ 정도전을 왕사(王師)로 삼는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1392년 조선을 개국한다.

비록 정도전은 태종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나 <태조실록>과 <용비어천가> 등에서는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을 매우 중요하게 적고 있다. 이성계는 군사력을 지닌 용장(勇將)으로, 정도전은 새 나라를 여는 명분을 제공하는 책사(策士)로서 각자의 역할을 다했다. 조선개국 후 정도전의 활약은 눈부셨다. 토지개혁을 통해 백성들에게 살길을 열어줘 민심을 얻음과 동시에 새 왕조의 재정기반을 튼튼하게 했다.

'경국대전'의 기반이 된 '조선경국전'
'경국대전'의 기반이 된 '조선경국전'.

왕도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규범도 제시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지어 임금과 신하가 조화를 이루는 왕도정치를 구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고려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를 배척하는 대신 성리학만이 실학(實學)이요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조선이 유교국가로 가는 토대를 닦았다. 정도전은 민본사상에 입각해 백성의 생업을 잘 살펴야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혁명적인 토지 개혁안을 수립해 추진했다. 민구수(民口數)에 따른 토지재분배와 공전제(公田制) 및 10분의 1세를 확립해 농민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한편 나라의 재정도 끌어올리려 했다. 고려 말 구가세족(大臣)들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들에게 나눠주는 토지개혁은 대신들의 위력(威力)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시키는 성격도 강했다.

정도전은 백성들에게 땅을 줘야 나라가 평안해지고 부강해진다고 믿었다. 민본사상을 설파하고 토지개혁에 전력했다. 유학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삼아야 왕도정치를 펼칠 수 있다고 믿고 불교를 억압했다. 대신들과 사찰의 횡포로 노비로 전락했던 양민들을, 다시 자영농으로 회복시켰다. 권력자들이 독차지하고 있었던 땅을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꿈꾸며 조선의 기초를 다졌다.

조선 개국 후 정도전은 이성계의 신임을 바탕으로 해 대단한 활약상을 보였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대역사를 주도하면서 현재의 경복궁 및 도성 자리를 정했다. 한양의 각 성문 이름과 한성부의 5부 52방 이름도 지었다. 대부분은 유교의 덕목이나 가치가 담긴 표현이었다. 정도전은 새로운 수도, 서울을 유교적 이상이 담긴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 정도전은 조선개국 후 7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자신의 뜻대로 조선을 만들어갔다.

정도전 동상(출처 위키피디아).
정도전 동상(출처 위키피디아).

정도전은 그러나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만다. 세자를 책봉하는 문제에 개입해 자신의 뜻에 맞는 왕을 세우려 한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태조 이성계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한명은 향처(鄕妻)인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이고, 다른 한명은 경처(京妻)인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였다. 신의왕후 소생은 방우·방과(정종)·방의·방간·방원(태종)·방연 등이다. 이들은 조선개국에 공이 컸다.

그런데 정도전은 이들을 무시하고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끔 막후에서 힘을 발휘했다.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명분으로 삼아 이방원등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들을 해체시키려 했다. 위기를 느낀 이방원은 1398년(태조 7년) 무력을 동원, 방석은 물론이고 정도전과 남은, 세자 방석의 장인 심효생 등을 죽이고 실권을 차지했다. 정도전은 조선 내내 신원되지 않다가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정도전의 공을 인정, 고종 때 겨우 신원됐다.

 

정도전의 아들, 정진 나주목사로 내려오다

정도전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다. 이방원이 정도전 등 정적을 척살하는 와중에 장남 정진은 붙잡혀 옥에 갇혔다. 정유와 정영은 아버지에게 변고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를 구하러 가는 도중에 이방원의 병사들에게 피살됐다. 정담은 이방원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나 아버지가 이방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칼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이방원 측근들은 정진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수군으로 보내 백의종군토록 했다.

왕위에 오른 이방언(태종)은 정도전의 아들 정진이 이렇다 할 반역 기미 없이 성실하게 수군에서 부역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1407년 정진을 나주목사로 임명했다. 자신에게는 정적이었으나 조선개국에 공이 큰 정도전을 죽였다는 회한(悔恨)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죽인 정도전의 아들을 나주목사직에 앉히면 화근이 될지도 모르는데, 정진을 발탁한 태종의 담대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당초 정진은 태조 즉위 후 공신의 적자(嫡子)였기에 벼슬을 받아 연안부사로 임명됐다. 그리고 아버지의 후광을 받아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아버지 정도전이 이방원에 의해 숨지고 반역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수군 병사로 강등돼 7년 동안 모진 삶을 살았다. 그런데 태종의 조치로 아버지가 귀양살이를 했던 나주목사로 내려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정진이 나주목사로 근무한 날은 20여일에 불과했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진은 이후 평탄한 삶을 살았으며 재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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