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의 혼] 구한말 하와이로 떠난 목포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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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의 혼] 구한말 하와이로 떠난 목포사람들
  • 입력 2020-08-13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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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121명의 조선인이 하와이로 가는 첫 이민선에 승선했다. 이 사진은 인천 내리교회 신자들이 이민선에 오르기 전 기념촬영한 것이다. 첫 이민선에는 내리교회 신자 50명이 승선했다.
1902년 121명의 조선인이 하와이로 가는 첫 이민선에 승선했다. 이 사진은 인천 내리교회 신자들이 이민선에 오르기 전 기념촬영한 것이다. 첫 이민선에는 내리교회 신자 50명이 승선했다.

 

도전정신 넘쳐던 정인수와 최사라

구한말 조선을 떠나 하와이에 정착한 조상들 중에는 눈에 띠는 두 명의 목포사람이 있다. 한사람은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항을 떠나 하와이로 향했던 121명의 조선 이민자들의 통역을 맡았던 정인수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17세에 불과했다. 다른 한 사람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로 일하던 조선남자들이 장가를 가기위해 고국으로 보낸 사진만을 보고 결혼을 결심, 조선여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하와이로 건너간 23세의 최사라였다.

17살에 불과했던 정인수가 어떤 연유로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또 목포출신인 그가 어떻게 해서 인천의 이민자들과 인연이 닿아서 그들의 통역자로 일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다. 그에 대해 밝혀진 것이라고는 목포출신이며, 영어에 능통했으며, 17살의 기혼 남자였다는 것이 전부다.

하와이섬에 도착한 사진신부들. 신앙의 자유와 새로운 세계를 동경했던 조선처녀들은 하와이 조선인 노동자들이 보내준 사진만 보고 결혼을 결심한 뒤 부모와 고향을 떠나 하와이로 왔다. 이들을 사진신부라 부른다. 사진신부들은 억척같은 생활력으로 가정을 꾸리고 조선부녀회를 조직해 조선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하와이섬에 도착한 사진신부들. 신앙의 자유와 새로운 세계를 동경했던 조선처녀들은 하와이 조선인 노동자들이 보내준 사진만 보고 결혼을 결심한 뒤 부모와 고향을 떠나 하와이로 왔다. 이들을 사진신부라 부른다. 사진신부들은 억척같은 생활력으로 가정을 꾸리고 조선부녀회를 조직해 조선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또 목포출신의 최사라는 조선최초의 사진신부(寫眞新婦)였다. 최사라의 신랑은 1909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총회장을 지낸 38살의 노총각 이내수였다. 그녀는 하와이에 도착해 가정을 이루는 한편 하와이의 조선여인들을 규합해 독립운동을 지원한 용기 있는 여인이었다. 한인이민사를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목포출신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출신지가 목포라는 것을 입증하는 공식문서는 없다.

작가 조정래 역시 그의 소설 <아리랑>에서 최초의 사진신부 최사라를 전남 목포출신으로 그리고 있다. 조정래는 <아리랑>에서 하와이 조선이민노동자와 사진신부들의 삶을 그렸다. 조정래 작가는 최사라를 강인한 생활력을 지녔으며 가족을 돌보면서 한편으로는 하와이 조선여자들과 함께 조선독립을 위해 헌신한 여성으로 묘사했다.

정인수, 최사라 이 두 사람의 경우에서 보듯 구한말 시대 목포사람들은 대단히 개방적이고 진취적이었다. 17살의 남자가 미국이민선의 통역이었고, 23살의 처녀가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시집을 가기로 결심하고 혈혈단신 미지의 땅 하와이로 떠났다는 사실은 목포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지역이었으며 목포사람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1897년 7월 4일 고종이 내린 목포항 개항칙령.
1897년 7월 4일 고종이 내린 목포항 개항칙령.

 

목포항의 개항

1897년 고종 황제는 칙령을 내려 목포를 개항한다. 구한말 목포는 한적한 고을이었다. 목포는 일찍이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물아혜(勿阿兮)군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무안군으로, 고려시대에는 물량군(勿良郡), 또는 무안군으로 불리웠다. 이때의 목포라는 지명은 무안지역을 포함한 이름이었다.

유진벨 선교사.
유진벨 선교사.

1397년(태조 6년)에 목포진이, 1439년(세종21년)에는 목포만호가 설치됐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순신장군이 목포 고하도에 수군진을 설치하고 108일 동안 머물렀다. 조선시대에는 수군진영이 있어서 제법 많은 군사들이 있었지만 일반 백성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목포는 한적한 어촌이었다.

그러나 목포항이 개항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개항되자마자 미국과 영국, 러시아, 일본 영사들이 앞 다퉈 목포로 몰려와 이권을 확보하는데 애썼다. 이때 목포에 들어와 적극적으로 선교하던 이가 미국 남장로교회 소속 유진벨선교사이다. 유진벨 선교사는 1895년 4월 부산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서울에 콜레라가 창궐하자 환자들을 돌보고,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고종의 침실에서 불침번을 서는 등 조선을 위해 헌신했다.

그 뒤 1897년 목포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목포진료소(1898)와 양동교회, 정명여학교, 영흥학교 등을 세웠다. 유진벨 등 미국선교사를 통해 들어온 새로운 문명과 미국이라는 신세계는 조선신분사회에서의 탈출을 노리는 하층민과 직업군인들, 신세계를 동경하던 어린 여자들에게 꿈을 안겨주었다.

유진벨 선교사. 오른쪽 말위에 탄 사람이 유진벨 선교사이다.
유진벨 선교사. 오른쪽 말위에 탄 사람이 유진벨 선교사이다.
전남지역에서 마차를 타고 전도활동을 하던 유진벨 선교사.
전남지역에서 마차를 타고 전도활동을 하던 유진벨 선교사.

이들은 때마침 고종이 주한미국공사(駐韓美國公使) 알렌의 부탁을 받아 이민업무를 관장하는 수민원(綏民院)을 설치하고 하와이 이민자들을 모으자 이민행렬에 끼어들었다. 목포출신의 17세 소년 정인수가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1897년 목포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유진벨 선교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사라 역시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인들의 하와이 이민 배경

1894년의 경우 하와이에는 1만3천명의 일본인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는 전체 노동자 수의 5분의 3에 달하는 숫자였다. 그러나 일본인 노동자들은 수시로 집단 태업(怠業)을 벌였다. 일본인 노동자들이 골치를 아프게 하자 하와이 농장주들은 또 다른 해외노동인력을 물색했는데 마침내 찾아낸 것이 조선인들이었다.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주한미국공사 알렌을 접촉했다. 1901년 조선에서 귀국해 오하이오 주에 머물던 알렌은 1903년 2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때 사탕수수 사업에 간여하고 있던 어윈(William G. Irwin)을 만나게 된다. 어윈은 조선에서 농장 일꾼들을 구할 수 있는지 여부를 타진했다.

알렌은 고종(高宗)을 설득해 백성들의 해외이민을 승낙토록 했다. 1902년 가을, 조선 정부로부터 이민허가가 떨어지자 알렌은 미국인 사업가 데쉴러(David W. Deshler)를 이민 알선자로 주선했다. 데쉴러는 알렌공사에게 부탁해 조선 조정이 해외이민업무를 전담할 기구를 설치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902년 8월 20일 수민원(綏民院)이 설치됐다. 고종은 민영환(閔泳煥)을 총재에, 서병호를 사무국장에 임명했다. 수민원은 서울과 부산(釜山), 인천(仁川), 원산(元山) 등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같은 이민 희망자들을 모집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유교사상에 젖어있던 조선인들은 부모·형제와 조상의 묘가 있는 고향을 떠나는 것을 죄악시했다.

이민희망자들이 거의 없자 데쉴러는 알렌을 통해 인천 내리교회의 존스(한국명, 조원시: George. Heber Jones)목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존스목사는 하와이에서는 더 자유스럽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도 풍요해질 것이라고 신자들을 설득했다. 결국 교인 50명이 이민을 떠나겠다고 나섰다.

이민선 겔릭호. 일본화물선 겐카이마루를 타고 나가사키에 도착한 조선인 이민자들은 겔릭호를 바꿔타고 하와이로 향했다.
이민선 겔릭호. 일본화물선 겐카이마루를 타고 나가사키에 도착한 조선인 이민자들은 겔릭호를 바꿔타고 하와이로 향했다.

이외에도 인천 항구 부두노동자 20여명과 배를 타는데 익숙한 강화도와 교동사람들도 이민대열에 합류했다. 마침내 1902년 12월 22일 모두 121명으로 구성된 조선인 최초의 이민단이 일본 화물선 겐카이마루(玄海丸)를 타고 제물포항을 떠났다. 일본에서 신체검사를 받아 101명이 나가사키(長崎)에서 미국 상선 S.S.겔릭(Gaelic)를 갈아탔다. 이들은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게 된다.

상륙 직전, 선상에서 받은 신체검사에서 눈병을 앓고 있던 15명은 상륙허가를 받지 못했다. 결국 86명의 조선인(남자 48명, 여자 16명, 어린아이 22명)들이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상륙했다. 호놀룰루 항을 거쳐 입국한 조선인 이민자 86명은 오아후(Oahu)섬 서북쪽에 있는 모쿠레이아(Mokuleia)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동했다.

이중에는 광주출신 조정태(45세)와 전주출신 문부근(22세)이 포함돼 있었다. 하와이 농장 곳곳에 조선인 이민자들을 데려다주고 그들을 보살핀 사람이 바로 목포출신 정인수다. 정인수는 데쉴러가 이민업무를 위해 설립한 동서개발회사의 사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포의 유진벨 선교사 주변에서 영어를 배워 이민회사인 동서개발회사에서 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와이 최초의 사진신부 최사라

사진신부결혼식 결혼식 장면-안원규와 이정송.
사진신부결혼식 결혼식 장면-안원규와 이정송.

최사라가 결혼을 하기위해 1910년 12월 2일 조선여인으로서는 처음 하와이에 오자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마치 자신이 결혼식을 올리는 것처럼 모두들 흥분하고 기뻐했다고 한다. 최사라와 이내수의 결혼식 주례는 민찬호(閔燦鎬)목사가 맡았다.

하와이에 이주한 조선 여인들.
하와이에 이주한 조선 여인들.

사진신부들이 하와이에 오게 된 배경과 그들이 사진 속 젊은 신랑과는 달리 하와이에 도착해 늙은 신랑을 만난 뒤 느꼈던 절망감 등을 최사라의 증언을 통해 직접 헤아리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에 아래의 증언을 그대로 싣는다. 이 증언은 1977년 당시 라철삼 기자(동아방송·KBS)가 채록해 방송된 것인데 (아메리카의 한인들)으로 정리됐다.

<최사라의 증언>

“안녕들 하시오. 나는 사라 최, 아니 최사라라고 합니다. 아마 많이들 낯설 거외다. 내 이름을 듣고 아 그 사람 하면서 무릎을 칠 사람은 천에 하나도 안 될 테지요. 조금은 긴 설명이 필요합니다. 나는 남편을 사진으로 처음 만났소. 그때 남편은 태평양 건너 하와이에 있었고, 나는 망해버린 조선 땅에 있었지. 무슨 얘기인지 짐작하시겠지?

나는 사진을 보고 신랑을 정하고, 혈혈단신 태평양을 건너갔던 천 여 명의 사진신부 가운데 1호 사진 신부였어요. 1978년께였나 하와이 초대 이민들에게 왜 이곳에 왔느냐는 여론조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껏 살아남아 있던 사진 신부들은 이런 대답을 했었지요.

“예수쟁이라고 놀림 받는 것이 싫어서, 남자들 횡포 때문에, 시부모를 안 모실 것 같아서, 하와이에는 빗자루로 돈을 쓸기 때문에 그걸로 친정을 돕기 위해서…”
1910년 11월 28일 내가 하와이에 발을 디뎠을 때 ‘남편’이 마중 나와 있었지. 내 나이 스물 셋. 그 당시 풍습으로는 혼기를 놓친 과년한 처자였지만 신랑 얼굴을 보니 고개를 들 수가 없더군. 부끄러워서였냐고? 아니 너무 기가 막혀서 그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신랑 이내수는 나이 서른여덟. 조혼 풍습 남아 있던 조선으로 따지자면 아버지와 딸이라고 해도 이상할 일이 없는 부부 아니었겠소. 그래도 나는 사진 신부들 가운데 나이가 많은 편이었고, 신랑은 신랑 후보군 가운데에서는 평균치였어요. 어떤 처자는 대놓고 신랑을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였소.

거기에다가 보내 준 사진은 대개 10년 전 사진이었거나 남의 좋은 차나 저택을 배경으로 멋들어지게 연출한 사진들이었으니 우리 사진 신부들 사이에 곡소리 드높은 것도 당연했지. 하지만 사기 당했다고 배돌려 돌아가기에는 태평양은 너무나 넓었어요. 결혼을 강요당하다가 정신 줄 놓아버린 사람도 있고, 악착같이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지. (중략)

그런데 우리 남편들은 어떻게 하와이로 오게 된 걸까요. 당시 하와이는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어요. 백인 노동자는 너무 비쌌고 중국, 일본인들도 세월이 감에 따라 미국 본토로 건너가거나 파업을 일으키거나 등등 호락호락하지 않게 됐기 때문에 하와이 농장주들은 유순한 일꾼들이 절실했지요.

이 사정을 안 것이 구한말 오래도록 미국 공사를 지냈던 알렌이었어요. 알렌은 휴가차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노동력 부족을 한탄하는 소리를 들었고, 한국인들을 끌어댈 생각을 하게 돼요. 알렌은 고종 황제에게 이렇게 얘기를 했다더군요.
“지금 백성들은 개국(開國)은 물론 진취(進就)를 원하고 있고 거기다 흉년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하와이로 보내서 척식사업과 신문화를 도입하도록 하는 게 현명한 선택입니다.”

하와이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고 있는 조선인 노동자.
하와이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고 있는 조선인 노동자.

마침 기근이다 전염병이다 골머리를 앓던 고종 황제도 귀가 솔깃해졌지요. 1902년 11월 최초의 공식적 이민단을 위한 ‘수민원’이 세워졌고 서울 부산 인천 진남포 원산 각지에서 이민을 모집하기 시작해요. 아마 내가 들은 것 이상으로 ‘지상낙원 하와이’에 대한 선전이 있었을 겁니다. 여러 차례의 설득과 모집 끝에 100여명의 이민단이 하와이로 가는 배에 올라 1902년 1월 13일 하와이에 상륙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우리 남편을 비롯한 한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설명하자면 며칠 밤을 새도 모자랄 거고, 초기 이민자 이홍기씨가 한 얘기로 대신하지요.

조선인노동자들이 고된 노동뒤에 잠시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다.
조선인노동자들이 고된 노동뒤에 잠시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다.

“나는 4시 30분에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새벽 5시에 일터로 나가서 5시 30분부터 일을 시작하여 오후 4시 30분까지 일을 했다. 점심시간 30분이 고작 휴식시간이었다…십장은 하와이말로 루나라 불렀는데 나의 십장은 독일인이었다. 루나(십장)는 우리를 마치 소나 말과 같이 그들을 채찍으로 다스렸다. 노동자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마치 죄수처럼 번호로 불렀다. 만일 그의 명령을 어기면 보통 뺨을 맞거나 사정없이 채찍으로 맞았다.” 
‘사진 결혼’은 그런 ‘사탕수수 노예’들이 심리적인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자꾸만 사고를 치거나 도박에 빠지거나 해서 ‘능률’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의 일환이었어요. 고종 황제에게 “개국과 진취” 운운했던 미국 공사 알렌이 사탕수수 농장주들에게는 뭐라고 한 줄 알아요? 이랬어요.

“조선인들은 인내심이 많고, 부지런하며, 유순한 인종이라. 그들이 갖고 있는 오랜 복종의 습성 때문에 지배하기가 쉽다..... 조선 사람들은 중국 사람에 비하면 교육하기가 쉬운 족속이다.”

이 인내심 많고 부지런하며 유순하고 오랜 복종의 습성 가진 노예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건 결국 짝이 없기 때문이었지. 그래서 또 한 번 사진 신부 열풍이 불었던 거고, 나를 비롯해 천여 명의 여자가 하와이로 건너가게 돼요. 망해버린 나라 대신 일본의 여권을 받아들고 나는 1910년 11월 28일 하와이에 상륙합니다.

조선인노동자들이 일했던 하와이 코하후쿠농장.
조선인노동자들이 일했던 하와이 코하후쿠농장.

그 뒤의 고생담은 굳이 주워섬기지 않겠어요. 딱 두 가지만 얘기하리다. 우선 하나는 미국 공사 알렌에 대한 괘씸한 마음입니다. 기근에 시달리는 나라에 와서는 ‘개국, 진취’ 따위의 말로 임금을 현혹하고, 태평양에 펼쳐진 황금빛의 미래를 설파하는 한편으로 제 동포들에게는 “얘 네들 부려먹기 쉬운 애들이야. 복종이 체질화된 애들이라고.”라고 낄낄대는 이가 무슨 외교관이란 말이오. 허긴 누가 그러더군. 그런 것이 외교고 통상이라고. 앞에서는 부드러운 말만 하지만 뒤로는 주판알 퉁기는 건 동서고금의 이치라고. 어째 지금은 좀 나아졌소? 두 번째는 우리 자랑입니다. 우리 한인들 일당은 초기 기준 남자 67센트, 여자 50센트였소. 근근히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 돈을 쪼개어 수십 년 동안 3백만 달러(추산)의 후원금을 모아서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했었어요. 적어도 알렌은 그거 하나는 잘못 봤었지. 우리는 ‘복종의 습성 때문에 지배하기 쉬운 민족’은 아니었거든.“

 

커네컷 (Kennecott)銅광산과 411명의 한국인 광부 그리고 전라도 인

앞에서 밝힌 대로 한인들의 미국이민은 1902년에 시작됐다. 인천 내리교회 신자 121명이 고향산천을 등 뒤로 하고 그해 12월 22일 인천항을 출발해 다음해 1월 13일 호놀루루 항에 도착했다. 공식적인 첫 이민행렬이다. 그 뒤 1905년까지 7천여 명의 한국인들이 하와이에 도착, 험한 이민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유타 커네컷 동광산 전경. 이 광산에서 작성한 고용카드에는 조선인광부 광부 411명의 명단이 있었다. 이중에는 전라도에서 온 10여명의 노동자가 포함돼 있다.
유타 커네컷 동광산 전경. 이 광산에서 작성한 고용카드에는 조선인광부 광부 411명의 명단이 있었다. 이중에는 전라도에서 온 10여명의 노동자가 포함돼 있다.

그러나 1900년대에 미국에 건너온 이민자들의 생활은 고통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경우 작업환경은 매우 열악했으며 한인들은 농장주들로부터 짐승 같은 대우를 받았다. 대부분의 한인들은 미 본토로 이주를 원했으며 운 좋은 한인 1천여 명이 1905년부터 1915년까지 10년 동안 미국본토로 이주하는데 성공한다. 1900년대 초 미 중서부 지역의 탄광지대에서 광부로 살았던 한인들은 대부분 하와이에서 건너온 이들이다.

미 중서부지역 최대 노천광산인 유타주 커네컷 빙험캐년 동광산에서는 1906년부터 채광이 시작됐다. 이 커네컷 광산에서는 46개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광부들을 고용하면서 신상기록카드를 작성했는데 성만 기록하고 이름은 이니셜 처리했다.

이 커네컷 광산 회사는 1906년 이후의 고용카드(Employment Card)를 최근 유타 대학교 고문서실에 기증했다. 이 고용카드는 노동자들의 각종 신상명세서와 고용․퇴직 일자를 적어둔 것이다. 최혁 작가는 지난 2000년부터 3년 동안 유타대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이정면교수와 함께 유타대 도서관에 보관된 수만 장의 고용카드를 꼼꼼히 조사했다.

이 결과 1909년부터 20년까지 10년 동안 커네컷 광산회사에서 일했던 한인들은 모두 411명이었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놀랐던 사실은 출신 국가를 ‘코리아(Korea)’ 또는 ‘코리아(Corea), 전라도(Jullado)’라는 식으로 정확하게 기록해 놓은 고용카드가 상당히 많았다는 점이다.

비록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지만 나의 조국은 분명히 코리아라고 주장하는 선인들의 목소리가 카드에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커네컷 광산에서 일했던 411명의 한인고용카드에서 출신지가 ‘전라도(Jullado)’로 적혀 있는 카드는 10여장이었다. 전라도에서 그 머나먼 유타의 광산까지 가서 일했던 전라도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전라도 사람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생활력을 고용카드에서 느낄 수 있었다.

커네컷 광산의 조선인 고용자카드. 출신지가 전라도로 기록돼 있다.
커네컷 광산의 조선인 고용자카드. 출신지가 전라도로 기록돼 있다.

Lee(이씨), Park(박씨), Kang(강씨) 등의 성이 적혀진 이 카드에는 개인별로 ‘영어를 약간한다’ ‘나름대로 의사가 통한다’는 기록과 함께 전 근무지와 입사일자, 퇴직일자, 일당 등이 비교적 자세히 쓰여져 있다. 이와함께 개인별로 나이, 체중, 신장, 눈과 머리의 색깔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고용카드에는 한국인 거의 모두가 독신(single)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간혹 가족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공통적인 특징은 이곳 광산에서 일하는 기간이 매우 짧다는 것이다. 짧게는 4-5개월, 길면 1-2년이었다. 고용자 카드에 기록돼있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맡은 일이 ‘Trackman’(보선공) 이나 ‘Trackgang’(채탄광부)로 돼있다.

 

사진제공

류기영

로베트라 장

 

도움말

민병용(LA)

박토마스(Denver)

이정면(Utah)

최혁 기자
최혁 기자 hyuckchoi@aitimes.com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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