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의 혼] 품바타령과 무안 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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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의 혼] 품바타령과 무안 김시라
  • 입력 2020-09-17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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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김시라선생. 각설이타령의 형식을 빌어 시대정신과 민중정신을 담은 품바를 창작해냈다.
생전의 김시라선생. 각설이타령의 형식을 빌어 시대정신과 민중정신을 담은 품바를 창작해냈다.

‘노래’는 인류역사와 함께 시작된 감정의 표현이다. 이 땅의 사람들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을 운율에 실어 표출했다. 노래는 시대에 따라 운율과 형식이 다르다. 과거에는 부르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구분되기도 했다. 시대와 형식에 따라 민요·창가·시조·판소리·잡가·창·가요 등으로 나눠진다. 노래와 춤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인류공통의 행위이기에 서양에서도 오페라를 비롯 다양한 형태의 노래가 존재하고 있다.

2020년, 요즈음은 트롯이 대세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트롯열풍은 어르신들은 물론 10대 청소년들에게까지도 번지고 있다. K-Pop은 세계인들이 좋아하는 노래가 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일고 있는 K-Pop열풍은 BTS(방탄소년단)의 신곡 다이너마이트가 2020년 9월 첫째 주 빌보드 핫100 차트 1위를 차지하면서 정점에 오른 느낌이다. 한국 가수 싸이는 지난 2012년에 노래 ‘강남스타일’과 ‘말춤’으로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80년대에 한국사회를 풍미했던 공연은 ‘품바’다. ‘품바’는 하층민인 각설이패가 부르던 노래(각설이타령)를 1981년 전남 무안 일로출신의 극작가 김시라(金詩羅)선생이 연극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을 뜻한다. 따라서 각설이타령과 품바타령은 다르다. 각설이타령은 걸인 등 하층민들이 장(場)이나 잔치 집을 돌며 부르던 타령이다. 품바타령은 각설이타령의 형식을 갖췄으나 내용은 한 걸인의 입을 빌려 시대상황과 사회모순, 야비한 권력을 냉철하게 비판하는 창작극 타령이다.

1982년 광주상공회의소 공연 모습. 광주일보와 금호문화재단 후원으로 공연이 이뤄졌다.
1982년 광주상공회의소 공연 모습. 광주일보와 금호문화재단 후원으로 공연이 이뤄졌다.

故 김시라 선생은 우리 고유의 극형식을 빌어 재담 좋은 이야기꾼이 사랑방에 마을사람들을 모아놓고 한 걸인의 일대기를 들려주는 내용으로 연극 품바를 만들었다. 그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희생당한 원혼과 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연극 품바를 기획했다. 연극 품바는 1981년 초연(初演) 이후 국내 최장기 공연기록을 세우며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는 연극으로 자리 잡고 있다.

품바의 내용은 천장근이라는 각설이 패 대장이 일제강점기와 자유당 말기까지 전국을 떠돌면서 느꼈던 세상살이에 대한 한(恨)과 탐욕스런 지배계층에 대한 해학·조롱이다. 품바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자유당 시절을 시간적 배경으로 해 천장근이라는 등장인물 1인이 16인의 역할을 하는 세미다큐멘터리 형식의 연극이다. 애련한 가락에 재치 있고 신랄한 풍자가 더해지고, 여기다 익살스런 몸짓과 춤사위 등이 더해져 관객들을 신명나게 한다.

앞서 밝힌 대로 품바타령의 원형은 ‘각설이 타령’이다. 각설이 타령은 아주 오래된 옛적부터 집을 잃고 유랑하던 걸인들이 동냥을 하면서 부르던 노래다. 전남 무안군 일로 밤나무골 비탈진 곳에는 각설이들이 모여살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천사촌’이라 불렀다. 이 천사촌 각설이들이 부르던 타령을 토대로 해 김시라선생이 시대정신과 민중정신을 담아 연극으로 만든 것이 품바다. 연극 품바는 1998년까지 국내외에서 4천여 회를 공연했으며 최근까지는 6천여 회를 넘겼다. 최다관객을 동원한, 명실상부한 국내최고의 상황연극이다.

김시라선생은 무안 일로 출신 청년·학생들로 구성된 ‘인의예술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1976년에 품바대본을 탈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역예술발전에 뜻이 있었던 서선진, 박문종씨 등 일로청년 14명은 1977년에 ‘인의예술회’를 창립하고 이후 각종 전시회 및 발표회를 가졌다. 연극 품바가 사람들에게 선을 보인 1981년 이후 폭발적인 인기를 끌 게 된 것은 김시라선생이 속해 있었던 인의예술회의 공이 크다.

인의예술회는 김시라선생과 함께 활발한 문화공연·전시활동을 펼쳤다. 김시라 선생이 1982년 품바공연과 함께 서울에 입성한 뒤에는 무안문화원을 재건·설립한 서선진 원장대행이 회원들을 아우르며 제11회 인의예술제까지를 치러냈다. 인의예술회는 김시라선생이 2001년 세상을 뜨면서 다소 활동이 주춤해졌다. 품바라는 이름이 저작권등록이 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때 수많은 공연단체들이 저마다 ‘품바공연’에 나서 품바가 보통명사화 돼버렸다.

인의예술회 활동공백기간 동안 다른 단체들이 품바공연을 앞 다퉈 실시하는 바람에 인의예술회가 전면에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연극 품바의 우선적인 연고권은 인의예술회에 있다. 인의예술회는 최근 사단법인으로 법인화하고 회원들을 확충하는 등 다시 활동에 나서고 있다. 인의예술회 김기형 회장과 서선진 전 회장 등 회원들은 김시라 선생이 창작·연출한 연극 <품바>의 작품성와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 ‘유사품바’를 배제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각설이 내력과 장타령과의 차이

<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1456년) 3월28일 조(條)에는 노래하고 춤추며 걸식하던 유랑패들에 대해 ‘산골짜기에 거처하면서 혹 자기들끼리 서로 혼취(婚娶)하거나 혹은 도살(屠殺)을 행하며, 혹 구적(寇賊)을 행하고 혹은 악기(樂器)를 타며 구걸하는 자’라 적혀있다. 1526년 중종실록에 는 유랑패들과 함께 곡예·가무를 하며 입에 풀칠을 하던 걸식 재인(才人)들에 대한 기사가 있다.

이때의 재인들은 ‘달단’에서 흘러 들어온 유랑민들로 보인다. ‘달’은 종족 이름을, 단은 오랑캐를 이르는 말이다.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살다가 원나라 멸망 후 곳곳으로 흩어진 ‘타타르족’을 말한다. 이들은 무복(巫卜)을 하거나 노래와 춤을 부르며 걸식했다. 이들은 때로 절도나 방화, 살인 등을 자행해 사회를 어지럽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들에 대해 ‘사당패, 걸립패, 무동패, 탈놀음패, 인형극패들과 함께 가무(歌舞)로 푼돈을 받아가며 생활했다’고 기록돼 있다.

품바공연 장면.
품바공연 장면.

한편 각설이의 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정이 있다. 가장 멀리로는 서기 660년 나당(羅唐)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해 멸망시키자 백제 지배층이 거지나 병신으로 위장해 걸인행각을 벌였는데, 이것이 각설이의 시초라는 것이다. 백제 지배층 중 문인계통은 광대로, 무인계통은 백정이나 줄타기 등을 하는 재인(才人)으로 신분을 낮춰 이곳저곳으로 떠돌며 목숨을 부지했다. 이때 이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식량과 돈을 얻었다. 이들이 호구지책으로 삼은 것이 바로 각설이타령이라는 것이다.

각설이의 어원에 대해서는 각설하는 사람, 사회에서 서리(된서리)맞은 사람, 각각 서리해오는 사람 등 설(說)이 분분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시대 대안(大安)·혜공(慧空)·원효(元曉)대사 세분이 “없는 사람들을 잘 도와야 한다”며 때로는 저자거리에서 춤을 추며 사람들을 설득했는데 여기서 나온 것이 ‘깨달음을 주는 말씀’이라는 뜻의 ‘각설이’(覺說理)라는 주장도 있다.

‘각설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 문헌기록은 <신재효 판소리 사설집>이다. <박타령>과 <변강쇠가>에서 각설이가 등장한다. <장타령>(場打令)과 <각설이타령>이란 노래의 명칭도 나타난다. 장타령은 각설이타령과 부르는 주체와 장소에서 본디 다른 것이다. 각설이 타령은 유랑·걸식하던 하층민들이 동냥을 하면서 부르던 노래다. 이에 반해 장타령은 ‘장돌림’, ‘부보상’, ‘장돌뱅이’로도 불린 장타령꾼들이 물건을 팔면서 사람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부르던 노래다.

요즘도 좌판을 벌이고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호객행위를 하면서 “골라, 골라” 소리 내며 박수치고 발장단을 구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현대판 장타령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각설이패들이 장돌뱅이들이 부르던 장타령을 자신들의 레퍼토리 중의 하나로 삼으면서 각설이타령과 장타령이 동일시되는 경향을 보였다. 무대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각설이타령은 전국적이다. 각설이들이 떠도는 곳이면 시장을 비롯 상가, 잔치집 등 전국의 모든 장소가 공연장이었다. 그러나 장타령은 장돌뱅이들이 각 지역 시장(市場)의 특성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각설이패들이 장돌뱅이들의 부르던 타령을 차용해 소리를 하면서 경계가 모호해진 것이다.

또 각설이 타령의 뒤풀이 형식을 말하는 장(10의 별칭, 10땡을 장땡이라 부르는 것처럼) 이 시장을 의미하는 장(場)과 혼동되면서 각설이 타령과 장타령이 동일시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각설이 타령은 자기묘사의 도입부로 시작돼 입방구인 반복 구, 일(1)에서 장(10)자까지의 숫자뒤풀이로 이뤄진다. 뒤풀이는 본풀이에 대한 대응이다. 1~9자까지 사설은 희극적이나 장(10)대목은 매우 냉소적이어서 사회비판적인 성격을 지닌다.

품바공연장면.
품바공연장면.

 

각설이 타령과 ‘품바’의 뜻

<각설이타령>은 각설이 자신에 대한 소개, 묘사로 시작된다. 각설이 신세가 된 사람들의 과거 신분은 다양했다. 탐관오리들의 수탈을 견디다 못해 떠돌이로 전락한 농민을 비롯 주인집에서 도망친 노비, 사회적으로 괄시를 받았던 백정과 같은 천민출신들이 많았다. 또 몰락한 양반이나 후예들도 있었다. 그래서 각설이 타령 시작부분은 은근슬쩍 자신들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나 핍박에 의해 소리와 춤으로 동냥하는 신세가 됐음을 알리고 있다.

“어허 이놈이 이래도 정승판서 자제로, 팔도감사 마다고 돈 한 푼에 팔려서 각설이로만 나섰네.”, “시전서전을 읽었는지 유식하게도 잘한다, 논어맹자를 읽었는지 대문대문 잘한다.” 하는 부분은 각설이패 중 상당수가 양반층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면서 장자부(10자부)에서는 ‘범’과 ‘포수’라는 두 개의 대립물을 배치해 당시 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과 잘못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장자부는 다음과 같다.

‘장 자 한 자 들고 봐/ 장한 숲에 범 두 마리/일류 포수가 다 모아도/ 그 범 한 마리 못 잡고/눈먼 봉사가 잡았단다/그 범 한 마리 잡을라고/ 일등 포수가 다 모여도/그 범 한 마리 못 잡고/ 진주에 났는 박 포소/몽당총으로 범 잡았네/ 장 자 한 장 들고 보니/키 크구 늙은 중놈/ 아랫목에 똥 싸놓고/ 웃묵으로 올라간다’

여기서의 범(호랑이)은 곧 사회적 재앙을 상징한다. 탐욕스러운 관리일수도 있고, 불합리한 신분제도 일수도 있다. 사람을 해치는 호랑이를 잡고자 ‘많은 포수’들이 나섰지만 범을 잡지 못했다는 비아냥은 왕이나 양반들을 겨냥한 것이다. ‘말로만 의와 정의를 내세울 뿐 실제로는 불의와 탐욕을 일삼는 지배계층의 이중적 태도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사회모순 해결을 외면하는 양반들’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표출한 것이다.

각설이타령은 자신들에 대한 신세한탄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양반들의 이중적 모습을 꼬집고, 불의한 세상이 계속되고 있는데 대한 불만이다. 각설이타령의 후렴구에 등장하는 ‘품바’는 각설이 타령의 후렴구에 사용되는 의성어다. 일종의 장단구실을 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각설이나 걸인의 대명사로 일반화됐다. 품바라는 단어가 처음 기록된 문헌은 신재효의 <한국 판소리 전집>중 <변강쇠歌>이다.

조선 말기까지 품바는 ‘타령의 장단을 맞추고 흥을 돋우는 소리’라 하여 ‘입장고’라 불렀다. ‘입장고’는 일제강점기와 자유당·공화당 세력이 득세했던 70년대까지는 ‘입방귀’로 말로 더 많이 사용됐다. 말 그대로 ‘입방귀’는 ‘말로 뀌는 방귀’라는 뜻이다. 일제에 빌붙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자, 독재 권력에 아부하면서 국민을 짓누른 자, 온갖 부정과 거짓으로 일신의 영달과 호의호식을 누리는 자들에 “에라~이 놈들, 방귀나 처먹어라!!!”라는 의미로 ‘입방귀’를 날린 것이다.

현실에 대한 울분과 한을 표현한 말이 동일어인 ‘품바’, ‘입장고’, ‘입방귀’인 것이다. 어떤 이는 ‘품바’는 한자의 ‘품’(稟)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稟’은 ‘주다’ ‘받다’ ‘내려주다’의 뜻을 지녔다. 각설이 타령에는 ‘밥을 달라거나 한 푼 보태 달라’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각설이들이 타령을 시작할 때 처음과 끝에 ‘품바’를 하는 것은 ‘각설이가 왔습니다. 타령 들어갑니다. 한 푼 보태줍쇼~’ ‘타령이 이제 끝났습니다. 한 푼 줍쇼~’라는 말을 건네는 것과 마찬가지다. 쑥스러움을 면하기 위한 말이다.

 

각설이패의 시원(始原)인 무안장과 천사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각설이타령의 선율이 경상도 방언의 억양과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각설이 타령이 경상도에서 생겨난 것 같다고 기술돼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기술돼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설이타령 선율의 구성음은 편의상 서양 음악의 계이름으로 표시하면 ‘미·솔·라·도·레’로 되어 있고, ‘미’나 ‘라’로 마치며 ‘미·라·도’가 주요 음이다. 선법은 ‘미’음을 떨고 ‘레’에서 ‘도’로 흘러내리는 목을 쓰는 메나리토리(메나리조)로 되어 있다. 이를 보아 이 노래는 경상도에서 생겨 세상에 널리 퍼진 것 같다. 곡의 느낌은 소박하고 구성지며 씩씩하다.’

그렇지만 앞서 밝힌 대로 각설이의 시원은 백제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또 각설이패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에서 ‘한바탕 놀고’ 동냥을 했다는 점에서 시장이 처음 생긴 것으로 알려진 무안을 각설이패의 등장무대로 비정하고 있기도 하다.

무안 재래시장. 품바의 원형인 각설이패가 유희를 벌였던 곳이다.
무안 재래시장. 품바의 원형인 각설이패가 유희를 벌였던 곳이다.

<조선왕조실록> 성종4년(1473)기록에 따르면 ‘1470년 큰 흉년이 들자 전라도 무안 사람들이 한 달에 한두 번 읍내거리에 시장을 열고 필요한 물건을 서로 바꾸었다’는 내용이 있다. 신숙주는 이 물물교환 장소를 ‘장문(場門)’이라 불렀다. 한편으로는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를 장시(場市) 혹은 시장이라 했다.

장시에 대해서는 관리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흉년 같은 위기가 닥쳤을 때에 시장을 열게 해야 한다는 의견과 도적들이 장물을 처리하는 곳으로 시장을 악용할 수 있기에 막아야 한다는 의견이 엇갈렸다. 흉년이 들어서 전라도 관찰사 고재필이 시장을 허가해 극복했던 것은 1470년이었다. 이때 나주와 무안 일대에 시장이 개설되었고, 한 달에 한두 번 장이 섰다.

무안은 나주만큼은 아니지만 영산강의 하구에 위치해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처음으로 시장이 개설된 지역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적시하면 일반적으로 무안의 일로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시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무안장은 누군가가 주도해서 시장을 개설한 것이 아니라 흉년을 이겨내기 위해 서로 가진 것을 교환하는 공간이 필요하면서 시장이 개설됐던 것이다.

영산강 하구에 위치한 무안 지역은 한반도에서 가장 빨리 시장이 개설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후기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1770)에 보면 당시 무안 지역에는 4곳에서 시장이 개설되고 있었다. 무안 읍내장(5, 10일), 남창장(1, 6일), 공수장(3, 8일), 장송장(4, 9일)이 그것이다.

무안 지역에서 가장 비중이 큰 시장은 <동국문헌비고>에 남창장으로 소개되어 있는 일로장이다. 일로장은 일제강점기에는 삼향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일로장이 남창장이라고 불렸던 것은 과거 조선시대에 영산강 하류에 있던 조창인 남창에서 유래했다. 또한 이 남창으로 인해 일로읍을 흘러가는 하천의 이름도 남창천이 됐다. 남창천은 무안군의 몽탄면 서쪽의 구리봉 북쪽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흘러 영산강 하류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남창천은 일로읍 면소재지인 월암리를 지나면서 장항포들과 같은 넓은 평야를 일구었다.

일로장이 비중이 높은 이유는 일로읍의 동쪽과 남쪽이 영산강 유역을 따라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로읍은 영산강을 통해 나주와 목포를 잇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일로읍의 남부와 북부는 해발 100m 안팎의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중부는 간척에 의해 넓은 경작지가 조성돼 있다. 게다가 남창천이 지나며 넓은 유역평야를 형성해 놓았다. 주요 생산물은 쌀과 보리, 콩, 고구마 등이었다.

일로장은 이러한 지리적 배경으로 무안 읍내장보다 교역이 더 활발했고, 우시장이 개설되어 있어 시장의 규모도 더 컸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도 호남선이 일로읍을 지나면서 교통의 편리함이 그대로 유지됐다. 다만 오늘날에는 호남선 복선 전철화에 따라 일로역의 위치가 바뀌면서 일로읍내와 1.5km 떨어지게 되어 과거보다 역 이용자가 크게 줄었다. 그 대신 1994년 서해안고속도로가 바로 옆을 지나면서 여전히 교통의 편리함을 유지하고 있다.

일로장이 처음에 어디에서 개설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호남선 일로역이 생기면서 역 후문과 연결되는 강남산마을로 장터를 옮겼다. 1956년(1960년이라는 주장도 있음)에 장터가 좁아 불편하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지금의 위치로 다시 이전됐다.

소지마을 입구에 있는 각설이마을 안내판. 뜻있는 이들은 각설이마을이라는 이름 자체가 없었다는 점을 들어 각설이마을보다는 천사촌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지마을 입구에 있는 각설이마을 안내판. 뜻있는 이들은 각설이마을이라는 이름 자체가 없었다는 점을 들어 각설이마을보다는 천사촌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지마을 안내판.
소지마을 안내판.

현대역사에 있어서도 무안은 각설이들이 모여 살면서 장날이나 고장의 대소사 행사, 마을 애경사 때 타령을 부르며 동냥을 한 곳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무안 일로역에서 약 1.2Km 떨어진 밤나무골 너머에는 각설이패들이 모여 살았다. 각설이마을이 생겨난 연유에 대해서 김시라선생은 생전에 발간한 <품바학개론>소책자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천사촌 마을 입구의 품바기념비.
천사촌 마을 입구의 품바기념비.
품바 천사촌 해설간판.
품바 천사촌 해설간판.

‘어느 해인가 극심한 가뭄이 들었는데 이 곳 일로에만 유독 걸인들이 모여들었다. 주민대표들이 어찌 이곳으로만 모여 드느냐?고 불평했더니 타향에서 괄시받고 푸대접받다가 이곳 이로에 오니 문전박대 않고 한 끼니만 있어도 나누어 주는지라, 고향에 온 기분으로 떠나지 않고 눌러앉았다고 걸인들이 대답하자 주민들은 오히려 그들의 사정을 불쌍히 여겨 따뜻이 대해주어서 천사촌이 이루어졌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일로읍 의산리에 있었던 천사촌(1986년 모습).
일로읍 의산리에 있었던 천사촌(1986년 모습).
각설이들이 살던 천사촌 움막 입구.
각설이들이 살던 천사촌 움막 입구.

사람들은 각설이패들이 몇 개의 움막·초가집에서 생활하는 무안군 일로읍 의산리 888번지를 ‘천사촌’이라 부른다. 걸인촌을 천사촌이라 부르게 된 시기와 연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자유당 집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어느 공식석상에서 걸인촌을 천사촌이라 부른데서 연유했다는 말이 있다. 분명한 사실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1970년대까지 전국 곳곳에 걸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 있었지만 무안 밤나무골의 걸인촌만 천사촌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추측컨대, 천사촌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가진 것 없는 각설이들이 부모 없는 아이들이나, 병들어 버려진 노인들을 데려다 먹여주고 수발들면서 보살펴주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주민들 눈에는 보잘것없고 비천한 각설이들이지만 마음씀씀이만큼은 천사들처럼 보였다. 각설이타령을 해서 받아온 밥과 돈을 가지고 어린아이와 노인들을 먹여 살렸다. 그래서 주변사람들은 각설이들이 사는 곳을 ‘천사 같은 이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천사촌이라 부르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자근과 김시라 선생

무안의 각설이패들을 이끌고 다니던 이는 김자근(金自根,?~1973)이라는 사람이다. 김자근은 각설이패들을 잘 이끌었다. 동냥질을 하고 다녔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피해를 끼치지 않았다. 동냥해온 밥이 부족했음에도 버려진 아이들이나 노인들과 나눠먹으며 잘 돌봤다. 그래서 인근 주민들은 김자근과 그를 따르는 각설이들이 사는 곳을 천사촌이라 했다.

김시라선생 생가터. 천사촌 바로 옆 동네다.
김시라선생 생가터. 천사촌 바로 옆 동네다.

김자근이라는 인물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김시라(김천동)선생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고향 무안에 내려와 청년들과 문화운동을 하던 중 김자근이 이끌던 각설이패의 타령을 접하면서부터다. 김시라선생은 상여가 나갈 때 김자근 각설이패가 부른 타령이 상두꾼의 상엿소리보다 더 처연하고 구슬픈데 주목했다. 김시라선생은 1980년 5월 전두환 등 쿠데타세력이 저지른 광주학살 소식을 듣고 원혼들을 위로하기 위한 연극 한편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1인극 품바’다.

1인극 품바는 일제강점기부터 자유당말기까지 전국을 떠돌며 살다가 전남 무안 걸인촌(乞人村)에 정착한 각설이패 대장 천장근의 인생 역정을 각설이타령과 구전민요, 재담, 익살스런 몸짓과 춤사위로 풀어낸 일인극이다. 각설이 패 대장의 일대기를 한과 해학이 담긴 품바타령으로 밀도 있게 풀어냈다. 그렇지만 <품바>의 대사들은 김자근의 실제 삶과는 상당부분 무관하다. 김시라가 연극 <품바>를 위해 천장근의 삶을 일부 각색한 것이다.

품바연극에 출연했던 배우들과 김시라선생. 우측부터 2대 배우 정승호, 1대배우 정규수, 김시라 선생, 3대배우 박동과. 1987년 3월 문예회관 대극장 앞뜰에서 찍은 사진이다.
품바연극에 출연했던 배우들과 김시라선생. 우측부터 2대 배우 정승호, 1대배우 정규수, 김시라 선생, 3대배우 박동과. 1987년 3월 문예회관 대극장 앞뜰에서 찍은 사진이다.
품바 공연 포스터.
품바 공연 포스터.

김시라선생이 창작하고 연출한 <품바>는 1981년 12월 인의연극제(향토연극제)의 제2회 공연작품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무대가 설치된 곳은 무안군 일로읍 공회당이었다. <품바>연극의 1대 배우는 정규수였다. 연극 <품바>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불의한 권력자들을 비꼬는 대사와 구수한 입담, 배꼽을 쥐게 하는 풍자에 관객들은 함께 웃고, 울고, 분노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키워갔다.

<품바>는 1982년 2월 광주일보와 금호문호재단 초청으로 광주상공회의소에서 공연됐다. 그 다음해인 1983년 2월에는 서울푸른극단 초청으로 말뚝이 소극장무대에 올려졌다. <품바>는 해외에서도 사랑을 받았다. 1987년에는 LA한국일보 초청으로 미국 10개 도시에서 순회공연이 열리기도 했다. 1997년에는 호주 멜버른 시드니에서도 공연됐다. 1998년 6월에는 <품바>4천회 돌파 기념공연이 호암아트홀에서 펼쳐졌다.

품바 역대 배우들 1대 품바 정규수, 2대 정승호, 3대 박동과, 4대 김영래·김광원, 5대 김대환, 6대 김규형, 7대 김기창, 8대 김은영·양가화, 9대 최성웅, 10대 여성 품바 박해미, 11대 이가경, 12대 최종원, 13대 박철민, 14대 선욱현, 15대 손성윤, 16대 전수환, 17대 선영욱, 18대 문정수, 19대 김뢰하·장용철·김왕근·박호산, 20대 여성품바 이재은.
품바 역대 배우들 1대 품바 정규수, 2대 정승호, 3대 박동과, 4대 김영래·김광원, 5대 김대환, 6대 김규형, 7대 김기창, 8대 김은영·양가화, 9대 최성웅, 10대 여성 품바 박해미, 11대 이가경, 12대 최종원, 13대 박철민, 14대 선욱현, 15대 손성윤, 16대 전수환, 17대 선영욱, 18대 문정수, 19대 김뢰하·장용철·김왕근·박호산, 20대 여성품바 이재은.
무대 옆에 앉아 북을 치고 있는 생전의 김시라선생. 무대옆에는 사물놀이 패(북·장고·꽹과리·징)가 앉아 장단을 맞추며 연극의 앞풀이와 중간풀이, 뒷풀이를 맡아 함께 무대에서 어울렸다.
무대 옆에 앉아 북을 치고 있는 생전의 김시라선생. 무대옆에는 사물놀이 패(북·장고·꽹과리·징)가 앉아 장단을 맞추며 연극의 앞풀이와 중간풀이, 뒷풀이를 맡아 함께 무대에서 어울렸다.

김시라선생은 <품바>20주년 기념공연을 준비하던 2001년,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품바>는 1981년 초연된 후 2001년 공연 20주년을 맞기까지 4천500여 회 무대에 올려졌다. 관객동원도 200여 만 명을 넘었다. 20주년 기념 및 고 김시라 선생 추모공연이 이뤄진 2001년 6월까지 12년 4개월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공연됐다. <품바>는 국내 최장기공연, 최다공연, 최다관객을 동원한 연극으로 한국기네스북에 수록됐다.

김시라선생이 갑자기 숨을 거두고 난 뒤 연극 <품바>는 정체기를 맞았다. 아내 박정재씨가 남편의 뜻을 받들어 <품바>의 지속적인 공연을 위해 애를 썼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인의예술회와 김시라선생이 주도했던 <품바>는 보통명사화 돼, 어떤 공연단체이든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품바>를 내걸고 공연을 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인의예술회 김기형회장(좌측)과 원년멤버 서선진 전 회장(우측)이 무안문화원 최석환사무국장과 품바의 계승발전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인의예술회 김기형회장(좌측)과 원년멤버 서선진 전 회장(우측)이 무안문화원 최석환사무국장과 품바의 계승발전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인의예술회의 활동이 뜸해진 가운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조순형씨가 2006년에 거지들을 모아 ‘일로품바보존회’를 만든 뒤 ‘일로품바’를 향토문화재로 자리매김 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앞으로 무안 지역사회의 과제는 김시라선생과 함께 연극 <품바>를 탄생시키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인의예술회와 조순형씨의 주도 아래 활동 중인 일로품바보존회와의 협력관계 설정이다.

품바는 무안각설이패의 타령을 원형으로 삼은 시대고발 및 인간성회복을 위한 서사극이랄 수 있다. 시대정신과 민중정신이 담겨 있다. 김시라선생은 천장근이라는 인물을 통해 억눌린 자들의 설움과 고통을 구성진 품바가락에 실어냈다. 또 천장근은, 비록 겉모습은 거지이나 세상의 모순과 거짓에 대해 통렬히 질타하는 모습에서 계세징인(戒世懲人)하는 도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품바>에 녹아있는 정신은 정의와 박애라는 점에서 인류보편적인 가치를 지닌 예술작품이다.

문병란시인이 <품바>를 관람한 뒤 ‘오늘날 민족문학이 지향하는 전통의 새로운 인식으로서의 품바는 양반이라는 지배계급과 일제라는 외세를 거치면서 단련된 원, 한풀이의 가사인데 거기다 현대적 의미로서의 승화는 민족예술로 승격됨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따라서 <품바>를 자랑스러운 남도예술의 한 장르로 육성시켜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공연으로 키워내느냐 여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김시라의 <품바>철학

김시라선생은 <품박학개론>이라는 소책자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 삶을 말씀헐랑께, 그저 한마디로 부끄러움 그것이네. 해방직후에 태어나 학창시절을 제외허곤 상경(1982년 12월)하기까지 전남 무안 내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제. 그 때가 천국이었어!...평소에 시(詩)나 그림이 좋아 젊은이들과 함께 인의예술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10여 년 동안 후학에 힘쓰며 주경야독하며 지냈네. 좋은 시절이었제. 그러다 79~80년 시대가 시대인지라, 명색이 장부인 디 가만히 앉아 공왈맹왈만 하고 있을 수 없드라고. 뜻한바 있어 품바라는 가장 낮은 자를 통해 이 시대 인권, 노사, 인간성, 민족애, 가치관등을 걸인의 푸념과 넋두리로 6여 년 간 1,500여회 공연을 허고 있는디 인정이 많은 국민이라 그런지 눈물도 많이 흘렸고 좋아허고 흐믓혀 하드라고 모두 자기 이야기들 마냥 말이여! 허허 그후 크게 깨달은 바 있어 85년부터 신학공부를 하기 시작혔는디, 거참! 예수님과 품바가 어찌나 흡사헌 지 아주 신명이 나드라고 아니 실감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겄제. 그리 선행만큼 신명난 일은 없는 것이여! 그런 께 이 우주의 중심은 사랑이라 혔제! 이렇게 깨달은 것도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헌 지...지금은 <품바>이후 졸작이지만 <남바><막달라 마리아> <청바> <피터교수> 등의 희곡과 소설 <왕과 詩> 이번에 발간허게 된 <품바시대> 20여 년 전부터 써오던 詩를 묶어 시집을 꾸미고는 있는디! 워낙 졸작들이라 내놓아도 될런 지...보잘 것 없고 구차헌 내 이야기 들어봤자고 그놈에 민주화나 잘 되어가야 할틴디!’

김시라선생은 생전에 ‘품바시대란 천사시대’는 말을 자주 했다. 그는 노동과 품바타령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노동 그 자체가 놀이이며, 놀이 그 자체가 삶인 시대! 천사(걸인)들의 노동이란 노래(품바타령)를 부르는 것이다. 그들은 신명나게 노래를 한다. 베푸는 자의 신명을 돋우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먼저 신명이 나야하는 것이다. 그 노동의 댓가로는 주는 자가 부담스럽지 않게 겨우 연명할 정도의 밥이나 곡식 그리고 쓰던 물건을 얻으면 그만이다.

품바공연 장면.
품바공연 장면.

억지로 받아내서도 많이 받아서도 안 된다. 이들의 목적은 얻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지고의 이상이란 어떠한 극한 상황에서건 베푸는 일이다라는 즉, 베푸는 연습을 시키는데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인간의 극한 상황에서 겨우 허기진 배나 채우고 이슬비 피해서 잠 잘 곳이면 족한 그들! 그들은 명예, 지위는 고사하고 모진 학대와 천시 속에서도 인간 최대의 교사로서의 임무를 즐겁게 수행한다.’

또 품바는 ‘가장 낮은 자의 가장 높은 신명의 울림’이라 규정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품바타령은 천국의 메시지’라면서 선행을 하는데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천사들의 노동이란 타령을 부르는 일이다. 인간이란 노동하는 동물, 일만이 생존의 의미를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을 즐거운 놀이처럼 대할 때 삶의 진정한 의미가 그곳에 있음을 안다. 역사상 모든 위인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긍지를 갖고 신명난 놀이처럼 했던 인간들이다.

또한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삶의 다양한 모습을 자주 노래로써 승화시킨 민족이다. 나무꾼은 나무를 하면서, 농사꾼은 논일 밭일을 하면서 농요를, 부인네들은 길쌈이나 물레를 돌리면서, 정자나무 밑에선 시조를, 심지어 장사를 지내면서까지 장송곡을, 이렇게 슬프거나 경사스러운 일을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그 민족의 민요를 보면 그 민족성을 알 수 있다 했는데 우리 민요처럼 멋지고 아름다우며 다양한 형태를 지닌 노래는 어느 민족에게도 찾아볼 수 없다. 허나 근래에 와서 우리 민족의 입에서 우리의 노래가 사라져 감은 심히 애석한 일이다. 노래는 자신도 모르게 생활 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와야지 규격화시켜 억지로 부르거나 꾸며서는 신명이 없다.

신명이 없음은 곧 가슴이 없음이다. 가슴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노래가 어떻게 감동을 주며 공감을 불러일으키겠는가. 민요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생겨난 노래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메시지! 품바타령은 천국의 메시지다. 그것은 가장 낮은 자들의 현장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움말

김기형

서선진

조순형

최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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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예술회

무안문화원

최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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