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멋] 추석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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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멋] 추석이야기
  • 입력 2020-09-17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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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의 아녀자들이 강강술래를 하고 있는모습. 1914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으로 남겨진 최초의 강강술래 모습이다.
진도의 아녀자들이 강강술래를 하고 있는모습. 1914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으로 남겨진 최초의 강강술래 모습이다.

올해는 10월 1일이 추석(秋夕)이다. 추석을 전후로 해 국민 1천 만 명 이상이 가족과 고향을 찾아 대이동을 하지만 올해는 사정이 다르다. 정부와 지자체들은 코로나 19확산을 막기 위해 올해 추석에는 가급적 고향을 찾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가족재회에 따른 기쁨도,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애틋한 추모의 정도 자제해야 한다. 마음으로 정을 주고받는 추석이 될 성 싶다. 코로나 19가 가장 큰 명절인 추석의 기쁨과 풍경까지도 바꿔버린 것이다.

옛날, 나라와 백성들의 한해살이는 농사가 잘 되느냐 여부에 달렸다. 농사의 풍흉(豊凶)은 백성들의 삶을 좌우했다. 농사는 생업의 전부였다. 농사가 잘돼야 먹고 살수가 있었다. 농사를 좌우하는 것은 날씨였다. 절기에 따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하면서 씨앗을 뿌리고, 잡풀을 걷어내고, 논밭을 살펴도, 비가 내리지 않거나 태풍이 불어 닥치면 한해 농사를 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한해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올해 농사가 풍년이 되게끔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원했다. 절기에 따라 농점(農占)을 치면서 파종시기를 조절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새해 초 고싸움이나 줄다리기와 같은 민속놀이를 통해 일부러 암줄이 이기도록 승부를 조작해 한해의 풍년을 염원했다. 임신과 풍요의 상징인 여성 쪽이 이겨야 농사가 잘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1960년대 추수장면. 고 이경모 선생이 남원에서 촬영했다.
1960년대 추수장면. 고 이경모 선생이 남원에서 촬영했다.

이런 간절한 바람과 노력 속에서 풍년을 맞이하면 농민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면서 조상들이 베풀어준 음덕(陰德)에 감사했다. 마을 사람들은 저녁이면 밝은 달 아래 모여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강강술래 등 민속놀이를 하며 마을사람들과 풍년의 기쁨을 나누며 우의를 다졌다. 내년에도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면서 가족․이웃들과 정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추석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때였다. 먹을 것도 많았고, 보고 싶었던 가족들도 만날 수 있었다. 너무도 먼 곳에 있어서 친정에 올 수 없는 딸의 경우는 반보기를 했다. 반보기는 중로보기라고도 불렀다. 추석에 많이 행했던 것으로 시집간 딸과 친정집 식구들이 중간 장소에서 만나(중로상봉:中路相逢) 음식을 먹으며 회포를 풀었다.

농민이나 아녀자들은 추석이면 바빴던 농사일에서 벗어나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살만한 세상이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고 염원했다. 외세의 잦은 침략으로 하루 앞날의 운명을 알 수 없었고 관리들의 수탈로 항상 배를 곯고 지냈지만 그래도 추석만큼은 행복한 날이었다.

 

추석의 기원

추석은 한해 농사를 끝내고 오곡을 수확하는 시기에 있는 절기다. 음력 8월 15일, 한가위에 해당된다. 고대사회 때부터 풍년에 감사하는 풍농제(豐農祭)는 다양한 형태로 자리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고대국가들은 저마다 다른 축제를 지니고 있었다. 중국의 <후한서>(後漢書)에 ‘부여는 납월(臘月.음력 12월)에 영고라는 제천행사(祭天行祀)를 열고, 고구려는 10월에 동맹, 예(濊)는 10월에 무천(舞天), 한(韓)은 5월과 10월에 축제를 연다’고 기록돼 있다.

추석에 대한 첫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유리이사금 9년(서기32)조에 등장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제3대 왕 유리이사금이 6부를 정한 뒤 이를 둘로 나누어 자신의 딸인 두 왕녀를 우두머리로 삼아 각 부의 여자들이 길쌈내기를 하도록 했다. 길쌈내기는 음력 7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 매일 아침부터 밤 10시경까지 이어졌는데 베를 더 많이 짜는 쪽이 이기는 방식이었다.

길쌈 내기에서 진 쪽은 음식과 술을 마련해 이긴 쪽 여자들을 대접했다. 이긴 쪽 이나 진 쪽 모두 노래(회소곡:會蘇曲)와 춤과 온갖 놀이를 행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를 가배(嘉俳)라 한다고 기록돼 있다. 가배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한가위’라는 단어에서 ‘가위’에 해당된다. 가운데를 뜻하는 당시 단어(가위)를 한자를 사용해 음차 표기(音叉表記)한 것이다.

옛 사람들은 가을 석 달을 초추(初秋), 중추(仲秋), 종추(終秋)로 나누었다. 석 달 중 가운데에 있다는 의미의 ‘가위’와 가장 크다는 의미의 ‘한’이 합쳐져서 ‘한가위’가 됐다. ‘가장 크다’는 것은 달의 크기를 일컫는다. 가장 큰 보름달이 뜨는, 음력 8월 15일을 명절로 삼은 것이다. 한편으로는 길쌈내기에서 진편이 이긴 편에게 음식을 ‘갚는다’ 뜻에서 비롯됐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1970년대초 진도 임회면 상만마을 농가에서 아녀자들이 절구통에 떡을 치는 모습. /일본인 학자 이토아비토 제공
1970년대초 진도 임회면 상만마을 농가에서 아녀자들이 절구통에 떡을 치는 모습. /일본인 학자 이토아비토 제공

가배는 ‘농사일의 궁중에서의 변형’으로 생각할 수 있다. 왕족이나 귀족 여인들의 경우 베 짜는 일은 일반 백성들의 농사짓는 것처럼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 만큼 가배는 ‘궁중 농사’인 베 짜기를 통해 백성들과 함께 풍요를 축하하는 행사로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길쌈놀이나 농사일은 마찬가지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신분차이와 장소만 달랐을 뿐, 풍요로움에 감사하는 성격은 똑같았다. 이런 성격을 지녔기에 가배가 한가위로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수서>(隋書)에는 한가위가 신라 이래 나라의 명절(國俗)로 내려오고 있음이 적혀 있다. <동이전>(東夷傳) 신라(新羅)조에 보면 ‘임금이 이 날 음악을 베풀고 신하들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여 상으로 말과 천을 내렸다’ 적혀 있다. <구당서>(舊唐書)‘동이전’에도 ‘신라 국에서는 8월 15일을 매우 중하게 여기고 음악을 베풀고 잔치를 열었으며 신하들이 활쏘기 대회를 했다’고 쓰여 있다.

또 일본 기록에도 신라인들이 추석을 명절로 즐겼음이 나타나 있다. 일본인 승려 원인(圓仁)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당시 ‘산동(山東) 근방에 살던 신라인들이 가배 명절을 즐겼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 초기의 가요집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실린 고려 가요 ‘동동’(動動)에는 ‘팔월 보름은 가배 날이건만 임을 모셔 지내야만 진짜 가배로다’라고 적혀있다. 이는 신라의 가배가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졌음을 말해준다.

 

추석놀이와 강강술래

추석 민속놀이는 다양하다. 강강술래를 비롯해 가마싸움, 거북놀이, 줄다리기, 닭 잡는 놀이, 쥐불 놓기들이 추석을 전후로 해 흥겹게 벌어졌다. 강강술래는 서남해안 지역, 특히 전남의 섬 지방에서 많이 행해졌다. 부녀자들이 즐기는, 추석의 대표적 민속놀이다. 강강술래는 지난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강강술래는 각 지역 사람들의 한과 서러움, 기대, 기쁨이 녹아 있는 어휘와 반복되는 후렴, 변화무쌍한 동작으로 구성돼 있다. 손을 잡고 뛰는 사람은 물론 보는 이들까지도 절로 흥이 나는 놀이다. 강강술래는 지역에 따라 소리와 춤이 조금씩 다르다. 농촌 지역에서는 농사와 관련된 가사가, 어촌이나 섬에서는 고기잡이와 관련된 소리가 주를 이뤘다. 그렇지만 어느 지역이든 강강술래의 가사는 삶에 대한 푸념보다는 희망과 더 나은 삶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1970년대 진도 부녀자들의 강강술래 모습. 이토아비토 제공
1970년대 진도 부녀자들의 강강술래 모습. 이토아비토 제공
1991년 제14회 영등축제에서 시연된 강강술래.
1991년 제14회 영등축제에서 시연된 강강술래.

강강술래는 추석뿐만 아니라 정월 설과 대보름, 단오, 백중에도 열렸다. 그렇지만 가장 크고 밝은 달이 휘영청 떠있고 날씨 또한 선선해 놀기가 좋은 추석날 밤이 강강술래를 즐기기에 가장 좋았다. 자연 추석날 강강술래 판은 민속놀이 중 가장 큰 판으로 벌어졌다. 수 십 명의 마을 여자들은 넓은 공터로 나와 손을 맞잡고 둥근 원을 만든 다음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강강’은 둥근 원을 만들어 논다는 뜻의 전라도 사투리다. 또 ‘술래’는 도적을 잡는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강강술래는 노랫소리와 원을 그리며 추는 춤의 빠르기에 따라 늦은강강술래와 중간강강술래, 잦은강강술래로 나눌 수 있다. 시작 부분에서는 소리를 느리게 내고 발걸음도 느리게 걷다가 차츰 빨라지는 형식이었다. 어느 정도 흥이 돋아지면 차츰 노래도 빨라지고 발걸음도 팔짝팔짝 뛰는 식이 됐다. 양쪽 사람의 손을 놓치지 않아야 원이 유지되기에 모두들 강강술래 노래의 속도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달이 휘영청 떠있는 대보름이나 추석명절에 도시아이들도 골목길이나 학교운동장에서 강강술래를 즐겼다. 도시에서도 즐길 정도였으니 시골은 오죽했을까? 시골아이들은 추석명절이면 쥐불놀이를 한창 하다가 서너 명이 손에 손을 잡고 뜀박질하며 강강술래를 돌았다. 남정네들 곁에서 막걸리 몇 잔을 마시고 흥이 난 여인네들도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동무를 구해 강강술래를 즐겼다.

지금은 보기 힘든 광경이다. 강강술래는 민속경연에서나 보는 놀이가 돼버렸다. 과거의 강강술래는 고된 집안일에 시달리던 여인들의 한풀이인 동시에 같은 마을 사람으로서의 공동체 의식을 다지는 군무(群舞)였다. 지금 경연장에서 대하는 강강술래에서는 여인네들의 한(恨)과 끈끈한 정이 없다. 메기고 받는 소리도 건조하다. 신이 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목청을 높이던 신명이 없다.

야유회에서 남자와 여자들이 함께 강강술래를 즐기고 있다. 1970년대 촬영된 사진.
야유회에서 남자와 여자들이 함께 강강술래를 즐기고 있다. 1970년대 촬영된 사진.

강강술래에 나서는 여자들은 대개 젊은 축이었다. 마을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많을 때는 30명 이상, 적게는 10명이상이 강강술래에 참여했다. 둥실 떠오른 보름달 아래 한복차림의 젊은 여인들이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뛰어노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고 신명을 불러일으켰다. 오랜 세월동안 전해져 온 가사와 몸동작은 다양했고 변화무쌍했다. 흥이 돋아지면 나이든 여인이나 어린아이들까지 끼어들어 강강술래를 즐겼다. 어떤 때, 가령 벚꽃놀이를 가서는 한잔 술에 취한 남자와 여자들이 야외에서 손을 맞잡고 즐기던 것이 강강술래였다. 모두들 그날만큼은 시름을 잊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1960년대 고흥지역 부녀자들이 강강술래를 하고 있는 모습.
1960년대 고흥지역 부녀자들이 강강술래를 하고 있는 모습.

그래서 강강술래는, 지금으로 치면 치유의 성격이 짙었다. 고된 집안일에서 모처럼 해방돼 스트레스를 말끔히 풀어내는 집단치유의 군무였다. 이런저런 일로 벌어졌던 사이도 손에 손을 잡고 뛰다보면 어느 사이 회복이 됐다. 치유와 회복. 강강술래는 마을과 사회를 건강하게 해주는 놀이였다.

강강술래가 언제부터, 어떤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공동체적 유희와 결속의 성격이 짙어 먼 옛날부터 행해져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강술래는 임진왜란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각종 구전에 따르면 이순신장군이 심리전용으로 강강술래를 즐겨 사용했다. 조선수군의 수가 많도록 보이기 위해 여인들에게 남자 옷을 입혀 바다에서 보이는 산에서 강강술래를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런 구전은 이순신장군이 왜군과 수시로 해전을 벌였던 해남과 완도, 진도, 무안, 신안, 영광 일대의 해안가나 섬에서 전해지고 있다. 해남의 경우 옥매산 정상에서 남자 옷을 입은 여인들이 수시로 강강술래를 했다. 강강술래의 모습은 먼 바다에서 왜군들이 보면 많은 조선 군사들이 떼를 지어 이동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이후 강강술래는 더욱 널리 행해지게 됐다. 왜군들과의 싸움에서 이긴 기쁨을 노래하는, 집단군무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추석놀이

■ 줄다리기

예전에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행해졌던 추석놀이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마을사람들 모두가 참여했다. 굵은 줄을 꼬아 만든 다음 마을 사람들을 두 패로 나누어 양쪽에서 잡아당겨 자기편으로 줄을 끌어온 쪽이 이기는 놀이다. 줄다리기는 대개 정월 대보름날에 했으나 지방에 따라서는 5월 5일 단오절이나 7월 보름날 백중절에 즐겼다.

고흥 초등학교운동회에서 학부모들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1970년대에 촬영된 사진.
고흥 초등학교운동회에서 학부모들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1970년대에 촬영된 사진.
초등학교운동회에서 빠지지 않고 벌어졌던 청군백군 바구니터트리기. 1970년대 고흥에서 촬영됐다.
초등학교운동회에서 빠지지 않고 벌어졌던 청군백군 바구니터트리기. 1970년대 고흥에서 촬영됐다.

칠석마을 줄다리기의 경우, 줄다리기는 정월 대보름에서 벌어지는 고싸움이 무승부가 날 경우 실시됐다. 고를 풀어 줄로 만든 다음 2월 1일에 줄다리기로 승부를 가렸다. 광주광역시 남구 대촌동 칠석마을 사람들은 예부터 고싸움놀이를 통해 마을의 단합을 다졌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풍년이 되기를 기원했다.

고싸움의 '고'란 옷고름 등의 단어에서 보듯 줄이나 노끈의 한 가닥을 길게 늘여 둥그런 모양으로 맺은 것을 말한다. 굵은 줄과 통나무 등으로 고와 고 몸체를 만든 다음 상대방의 고를 덮쳐 땅에 닿게끔 하면 이기는 방식이었다. 칠석마을 사람들은 고싸움이 승부가 나지 않을 경우 일단 고를 풀어서 줄로 만든 다음 줄다리기로 승부를 겨뤘다.

1953년 고흥에서 벌어진  씨름대회 모습.
1953년 고흥에서 벌어진 씨름대회 모습.

■ 씨름

씨름은 추석을 비롯 단오와 백중, 정월대보름에 벌어졌던 우리 고유의 겨루기다. 큰 고을 잔디밭이나 백사장에 판을 벌여 힘깨나 쓰는 장정들이 나와 힘과 기량을 겨뤘다. 마지막 승자에게는 장사란 호칭이 주어지고 부상으로 황소 한 마리, 혹은 쌀 한가마가 주어졌다. 명절이 되면 씨름은 가장 흥미진진한 볼거리였다. 씨름판에 사람들이 몰려들면 주변에 온갖 장사치들이 전을 벌이고 법석을 떨었다.

1980년대 들어와 씨름경기가 TV로 중계되면서 경기룰과 기술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활발하게 방송출연을 하면서 20여년 넘게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강호동이 천하장사 출신이다. 인제대교수 이만기 역시 천하장사였다. 이만기 교수는 1990년 스물일곱의 나이로 은퇴하기까지 천하장사를 10번, 자신의 원래 체급에서 한라장사 7번을 해냈다.

1956년 호남씨름대회에서 우승 한 고흥출신 김일 청년장사. 김일장사는 후에 프로레슬링 선수가 돼 한국인들에게 희망과 자부심을안겨줬다.
1956년 호남씨름대회에서 우승 한 고흥출신 김일 청년장사. 김일장사는 후에 프로레슬링 선수가 돼 한국인들에게 희망과 자부심을안겨줬다.
1973년 진도 십일시장 풍경. 명절때면 시장에서는 씨름시합이 열리곤 했다.
1973년 진도 십일시장 풍경. 명절때면 시장에서는 씨름시합이 열리곤 했다.

■ 활쏘기와 가마싸움

추석날이면 활을 쏴 과녁을 맞추는 경기를 했다. 여러 궁사들이 줄을 서 있다가 차례로 활을 쐈다. 과녁에 명중되면 구경꾼들이 지화자 노래를 부르면서 격려하면서 축하했다. 가마싸움은 아이들이 즐기던 놀이였다. 각 서당의 학동들이 가마와 기를 만들어 서로 대적해 싸우는 놀이였다. 상대 학동들의 방어를 뚫고 가마를 부수거나 기를 빼앗으면 이기는 것으로 했다. 학동들의 단합심과 담력을 키우는데 매우 좋은 놀이였다.

 

추석빔과 아이들의 추석나기

추석이 되면 아침과 저녁의 날씨가 제법 차가워진다. 옛 사람들은 추석을 전후로 해 여름옷을 가을 옷으로 갈아입었다. 추석에 입는 새 옷을 추석빔이라 했다. 작가가 어릴 때만 해도 추석빔은 대단한 선물이었다. 1970년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잘 입혔던 옷은 ‘나이롱(나일론) 바지’였다. 질겨서 잘 헤지지가 않았다. 추석과 설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아이들의 손을 이끌고 시장으로 가서 나이롱 바지와 좀 두꺼운 스웨터를 사주곤 했다.

옷 한 벌을 사준 뒤 어머니는 아이들의 신발을 살펴보고 구멍이 나있거나 많이 닳아져있으면 검정 고무신을 사주기도 했다. 큰마음 먹고 운동화를 사줄 때도 있었는데 아이들에게 그것은 대단한 횡재였다. 70년대에 가장 인기가 있었던 운동화 상표는 ‘범표’ 운동화였다. 검정이나 파란 천에 하얀 끈이 달린 운동화였는데 몹시 근사했다.

대개 한반 학생 수는 60여명이었는데 그중 2~3명만 운동화를 신었었다. 그랬으니 운동화를 신는다는 것은 친구들에게 몹시 뻐길 수 있는 일이었다. 새 운동화를 사면 그 설렘과 기쁨에 잠을 설치곤 했다. 머리맡에 새 운동화를 두고 잠결에도 몇 번이나 운동화를 매만지곤 했다. 추석은 아이들에게 새옷, 새신이 생기는 참으로 좋은 때였다. 게다가 떡과 과일까지 눈치껏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으니 추석이야말로 최고의 명절이었다.

아이들은 아껴두었던 용돈으로 폭죽을 샀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화랑성냥을 챙겨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폭죽을 터뜨렸다. 그러고 있으면 잠시 뒤 어른들이 쫓아올라와 “불난다”며 아이들을 몰아냈다. 그때만 하더라도 아이들은 동네아저씨들을 매우 무서워했다. 한번 야단을 맞았으니 다시 폭죽놀이를 하는 것은 힘들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학교운동장으로 몰려갔다. 그런 다음 철봉에 매달려 놀거나 아니면 여럿이서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돌았다.

 

추석에 했던 일들

추석 전에 해야 할 일은 아주 많았다.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벌초였다. 벌초는 조상의 묘소에 가서 풀을 베는 것이다. 벌초를 끝내면 묘소 주변을 깨끗하게 치웠다. 벌초는 조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추석이 다 되가는데도 풀이 무성하게 덮여있는 무덤은 남들에게 조롱감이 됐다. 오죽 못나고 게으르면 조상의 묘를 저렇게 관리하느냐는 핀잔이 돌아갔다.

1970년대 촬영된 성묘모습. 고흥에서 한가족이 추석 성묘를 하고 있다.
1970년대 촬영된 성묘모습. 고흥에서 한가족이 추석 성묘를 하고 있다.

추석 전날에는 집 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했다. 그리고 온몸을 씻었다. 대개 추석 전날이면 온가족이 둘러앉아 송편을 빚었다. 추석날 아침에는 추석빔을 입고 남자들은 차례준비를 했다. 여인들은 차례 상을 차린 다음 밖에서 차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길고 긴 차례가 끝나면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차례에 올렸던 음식을 먹었다(飮福). 아침식사를 끝내면 조상의 산소에 올라가 성묘를 했다.

 

추석의 대표음식 송편

송편은 햅쌀을 곱게 빻아 가루로 만든 다음 이를 반죽해 조금 떼어낸 뒤 안에 햇녹두와 청태콩, 동부, 깨, 밤, 대추, 고구마, 곶감, 계피가루 등을 소로 넣어 둥글게 빚는 것을 말한다. 송편은 지역에 따라 반죽에 넣는 재료와 소를 만드는 재료가 다르다. 송편은(소나무 송 松 떡 병 餠)자를 써서 원래 송병이라고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송편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반달 모양으로 빚은 떡을 송편이라 한 것은 이 떡을 찔 때 켜(층층)마다 솔잎을 깔았기 때문이다. 솔잎은 향균 작용이 뛰어나다. 한방에서는 솔잎이 신경통과 관절염, 동맥경화, 고혈압, 피부질환, 위장질환, 간질환 등에 효능이 뛰어나다고 밝히고 있다. 현대의학에서도 솔잎에는 비타민과 클로로필 등 다양한 성분이 들어있으며 특히 터펜 화합물질은 불포화 화합물로서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고 호르몬 분비를 원활하게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솔잎을 사용해 찌는 것은 매우 과학적이다. 송편은 쌀가루와 햇콩 등으로 만든 떡을 솥에 쪄서 익히기 때문에 수분이 많다. 그런 만큼 쉽게 상한다. 솥에 찔 때 솔잎을 사용하면 항균력이 높아져 쉽게 쉬지 않는다. 게다가 솥에 찔 때 솔잎을 넣으면 송편들이 서로 달라붙어 범벅이 돼버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 햇콩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까지 잡아주니 여러 가지 효과가 있다.

1971년 제수찬 마련을 위해 전을 부치고 있는 모습. 진도에서 촬영됐다. 이토 아비토 제공
1971년 제수찬 마련을 위해 전을 부치고 있는 모습. 진도에서 촬영됐다. 이토 아비토 제공

송편이 반달 모양을 하고 있는 것도 유래가 있다. 송편은 고대사회에서부터 우리 민족이 즐겨먹었던 한가위 떡이었다. 그래서 본디 송편은 보름달 모양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백제 의자왕 때 하루는 궁궐의 땅속에서 거북이등이 출토됐다. 거북이 등에는 ‘백제는 만월(滿月)이라 기울 것이나 신라는 반월(半月)이라 점점 흥할 것이다’ 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실제 이 글대로 백제는 국운이 쇠해 망하고 신라는 국운이 차올라 삼국을 통일하게 됐다.

이후로 사람들은 송편을 보름달 모양으로 하지 않고 반달모양으로 빚었다고 전해진다. 조상들은 송편을 만들면서 집안이 좋은 일들로만 가득차기를 기원했다. 아이들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재물도 더욱 차오르기를 고대했다. 단순한 것 같지만 송편 하나에는 가족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 있다. 여자들과 함께 송편을 빚었던 남자들의 경우에는 학문이 더욱 커져서 나라의 큰 기둥이 되기를 염원했음 직 하다.

송편과 관련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은 고려 말 학자 이색의 시문집인 <목은집>(牧隱集)에 등장한다. 이색은 ‘차기장떡’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뉘가 알까 이 떡의 향기를/ 겉은 황금빛이 넘쳐나네/팥소가 속에 있으니 배를 부르게 하고/ 먹기 쉬워 배고픔을 달래기 좋은데/삭히기가 어려우니 때로는 배탈이 나기도 하는구나’

이 ‘팥소를 넣은 차기장떡’은 송편의 일종으로 추측된다. 이런 기록을 참조해보면 고려 때 송편은 대중화된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송편에 관한 기록은 조선시대 후기 홍석모가 지은 세시풍속집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나온다. 여기에는 송편이 ‘나이 떡’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 책에는 ‘정월 보름날 농가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로 집집마다 장대에 곡식 이삭을 매달아 대문간에 세워뒀다가 중화절(中和節·음력 2월1일)에 이것으로 송편을 만들어 노비에게 나이수대로 나눠줬다’는 내용이 있다. 옛사람들은 그래서 이날을 ‘노비일’로, 이 송편을 ‘나이떡’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 풍습은 사라지고 송편은 추석의 절식으로만 자리 잡았다.

음식칼럼니스트 김학민은 ‘송편은 추석 때 온 식구가 모여 함께 만들고 함께 먹는 별식일 뿐 아니라 차례상의 중요 진설(陳設) 품목이다. 즉 송편은 1년 농사를 성공적으로 갈무리해 수확했음을 고하는 조상에 대한 보고의 상징이다. 이 때문에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쌀을 가루 내 버무린 반죽에 콩·팥·깨·대추·잣·밤·은행 등 가을 특산물을 소로 넣어 만든다. 그러니까 송편은 수확한 모든 것을 합하는 총합적 의미를 갖는다’고 적고 있다.

핵가족화가 되면서 예전의 추석풍경을 찾아보기 힘들다. 도회지 사람들 대부분은 성묘 대신 해외여행을 떠난다. 벌초는 대행업체에 맡긴다. 추석에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가정도 드물다. 나이 적은 여자들에게 송편을 찌는 일은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클릭 한번 하면 다음날 모시송편이 도착한다. 아파트 단지 밖에만 나가도 송편을 살 수 있는 떡집이 많다.

어쩌면 추석풍경을 지우고 있는 이는 우리들 자신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 집안청소를 시키고 차례상 준비를 거들도록 가르치는 대신 공부하라고 방으로 몰아넣는 부모들이 많다. 아이들을 데리고 송편을 빚는 부모들도 거의 없다. 어쩌면 부모와 자녀들이 한데 앉아 송편을 빚는 것은 떡을 빚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빚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그 소중한 시간을 외면하고 있다. 송편을 빚으면서 부모에 대한 사랑을 키워야할 아이들의 손에는 송편대신 게임과 체팅을 즐기는 스마트 폰이 들려 있다. 부모들은 아이들과 부딪치기 싫다는 이유로 아이들 손에서 스마트폰을 빼앗지 않고 있다. 차츰차츰 전통적 의미의 추석은 달력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조상과 부모에 대한 존경, 그리고 자연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줄어들고 있다. 추석다운 추석이 그립다.

도움말

김종호

김학민

박정석

송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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