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수마트란 코끼리(사진 위키피디아 제공).
인도네시아 수마트란 코끼리(사진 위키피디아 제공).

지금(2021년)으로부터 615년 전인 1416년 코끼리가 전라도 순천부(順天府) 장도(獐島)로 유배를 왔다. 기후와 풍토상 한반도는 코끼리가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어디 다른 나라에서 온 코끼리임이 분명하다. 조선 땅에 코끼리가 있었다는 것도 신기한데, 전라도로 유배까지 왔다니 그 사정이 궁금하다. 이번 회에는 머나 먼 이역 땅 조선에까지 끌려왔다가 유배생활을 하다 숨진 ‘팔자 사나운 코끼리’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조선 태종, 일본 왕으로부터 코끼리를 선물로 받다

조선 태종 즉위 11년인 1411년 2월 22일, 코끼리가 한양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코끼리는 일본 쇼군이 조선 왕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다. 당시 일본은 조선과의 교역을 통해 부족한 쌀과 생필품들을 충당했기에 조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특히 일본은 조선 측이 내주는 대장경(大藏經)에 목을 매달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측이 코끼리를 헌사하고 무엇을 받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코끼리가 어떤 해로와 육로를 거쳐 한양까지 왔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다. 그렇지만 조선 초 대마도주가 남해안 일대의 포구를 통해 조선과 교역을 했던 것을 감안하면 부산포나 제포(진해), 염포 등을 통해 코끼리가 실려 왔을 것으로 보인다. 부산포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어떤 기록에는 코끼리가 일본에서 보내진 코끼리가 전라도 장도에 잠시 머물다가 한양으로 온 것으로 나타나있다. 그렇다면 이동경로가 부산포~장도~한양일 수도 있다.

장도를 떠난 이 코끼리는 일본 사신과 함께 최소한 1~2개월을 육로를 통해 한양으로 왔을 것이다. 코끼리를 처음 본 조선백성들의 놀라움이 상당했을 것이다. 이 코끼리는 당초 1408년 인도네시아 국왕이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 수립를 위해 일본의 쇼군에게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코끼리는 엄청난 먹성을 지녔다. 보통 하루에 120~180kg 정도의 식물을 먹어치워야 건강하게 산다. 소화기능이 약해 음식소화를 잘못시키기에 먹은 것의 40%밖에 흡수하지 못한다. 얼마 되지 않아 일본 왕은 근심에 쌓였다. 일본은 식량이 부족한데 코끼리가 하루에 콩 몇 말씩을 먹으니 데리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 쇼군은 조선과 선린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선물로 코끼리를 선사하기로 결정했다. 조선왕에게 주는 기이한 선물이면서도 식량이 축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으니, 꿩 먹고 알 먹고 식의 묘안이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에서 온 코끼리는 일본에 온지 3년 만에 다시 조선으로 건너오게 된 것이다. 코끼리가 몇 마리인지는 정확치 않다. 코끼리와 관련된 기록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1마리인 듯싶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에서 선물한 코끼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일본 국왕(日本國王) 원의지(源義持)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코끼리를 바쳤으니, 코끼리는 조선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명하여 이것을 사복시(司僕寺)에서 기르게 하니, 날마다 콩 4~5두(斗)씩을 소비했다.’

사복시는 궁중과 군에서 필요로 하는 말을 키우는 관청이다. 조선 조정은 남해안 일대 40여 개소에 목장을 두고 말을 키우고 공급했다. 태종의 명에 따라 사복시 관리들이 코끼리를 돌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코끼리가 먹어치우는 양식을 대는 것이 문제였다. 하루에 18~20시간동안 먹기만 해대는 코끼리의 거대한 식성을 충족시켜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본 쇼군이 보내온 선물이라 죽일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키웠다.

■전직 관리를 죽인 코끼리, 전라도로 유배당하다

사복시는 코끼리를 먹이를 대느라 골치가 아팠다. 거기다 조정대신은 물론이고 궁궐에 연줄이 닿은 사람들이 코끼리 구경을 오면 이들을 안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와중에 정 3품 자리인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던 이우(李瑀)가 코끼리에 밟혀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1412년(태종 12년) 12월 10일의 일이었다. 이우는 코끼리가 있는 곳을 찾아가 모습이 흉하다며 욕을 하면서 침을 뱉었다. 그러다가 성난 코끼리의 발에 밟혀 죽었다.

이우가 어떻게 코끼리를 놀렸는지, 이와 관련된 기록이 없으니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다. 이우가 코끼리 곁에 가까이 다가가 막대기로 찌르거나 돌을 던지면서 코끼리의 화를 돋우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순한 말귀를 못 알아듣는 코끼리가 욕설을 했다고 사람을 죽일 리는 만무다. 이우가 스스로 화를 자초한 정황이 짙다. 문제는 전직관리가 죽었다는 것이다. 코끼리는 졸지에 사람을 죽인 ‘사나운 동물’이 되고 말았다.

조정대신과 사대부들은 코끼리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며 들고 일어났다. 병조 판서 유정현(柳廷顯)은 태종에게 이와 같이 진언(進言)했다.

“일본에서 바친 코끼리는 임금이 완호(玩好)하는 동물도 아니고 또한 나라에 이익도 없습니다. 게다가 사람까지 죽였으니 이 짐승 또한 죽여 마땅합니다. 일 년에 먹이는 꼴은 콩이 거의 수백 석에 이른다고 하니 전라도의 섬(海島)으로 보내소서.”

매립사업이 시작되기 전의 장도 일대 모습
매립사업이 시작되기 전의 장도 일대 모습

결국 코끼리는 전라도 순천부에 속해 있는 장도(獐島, 노루섬)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장도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섬은 몇 개가 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보면 장도라는 이름을 가진 섬은 여수시 웅천동 산 274, 보성군 벌교읍 장도리, 진도군 지산면 가학리, 신안군 장산면 팽진리, 신안군 팔금면 진고리, 신안군 하의면 능산리, 경남 하동군 금남면 대도리 207, 경남 통영시 인평동 산24 등이다.

■ 코끼리 유배지 장도(獐島)는 어디일까?

<조선왕조실록>에는 코끼리가 유배를 간 섬이 순천부(順天府) 장도(獐島)라 기록돼 있다. 조선시대 순천부에 속해있던 장도에는 지금 율촌산업단지가 들어서 있다. 율촌산단이 있는 곳은 예전에 바다였다. 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신성포와 장도 일대 바다는 매립돼 뭍이 되고 말았다.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일대에는 순천왜성이 있다. 순천왜성(順天倭城)은 왜교성(倭橋城)이라고도 하는데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축성한 뒤 조명연합군에 맞서 버틴 곳이다.

1598년 정유재란 당시 권율(權慄) 도원수와 유정(劉綎) 제독의 조명연합군은 육지를 통해 순천왜성을 공격했다. 이순신(李舜臣) 삼도수군통제사와 진린(陳璘) 도독은 바다를 틀어막고 왜군을 공격했다. 순천왜성 전투가 시작된 첫날인 9월20일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은 왜군의 해상기지인 왜성 동쪽 장도(獐島)를 장악해 군량과 마필을 탈취했다. 이 장도가 바로 지금 여수율촌산단 일부가 돼 버린 섬이다. 작가는 여러 가지 정황상 현재의 여수시 율촌면의 장도가 코끼리 유배지였다고 판단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보성군의 장도를 코끼리가 유배 왔던 섬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여수라는 지명은 조선 초와 조선말에 잠깐 등장했을 뿐 지금의 여수지역은 과거 순천부에 속했다. 따라서 지금의 여수시 웅천동 장도, 여수시 율촌면 여동리의 장도 역시 조선시대에는 순천부에 속했다. 보성 장도 역시 과거에는 순천부에 속했던 섬이다. 그렇지만 코끼리가 유배 왔던 섬은 율촌의 장도다.

장도. 광양만에 있는 섬이다. 조선 태종 때 코끼리가 유배를 산 곳이다. 정유재란 당시 에는 순천왜성에서 농성전을 벌이던 왜군의 전초기지로 사용됐다.
장도. 광양만에 있는 섬이다. 조선 태종 때 코끼리가 유배를 산 곳이다. 정유재란 당시 에는 순천왜성에서 농성전을 벌이던 왜군의 전초기지로 사용됐다.
율촌산업단지 조성 당시 토석채취장이 되면서 장도 절반이 파헤져졌다.
율촌산업단지 조성 당시 토석채취장이 되면서 장도 절반이 파헤져졌다.
율촌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장도는 육지에 있는 조그만 동산이 되고 말았다.
율촌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장도는 육지에 있는 조그만 동산이 되고 말았다.
보성 목섬. 장도에서 노둣길로 연결돼 있다. (산쟁이 블로그캡쳐)
보성 목섬. 장도에서 노둣길로 연결돼 있다. (산쟁이 블로그캡쳐)

이름으로만 따지면, 웅천 장도와 보성 장도는 코끼리가 유배 온 섬으로 여겨질 수 있다. 보성군에서는 보성 장도를 코끼리가 유배 온 섬으로 단정하고 벌교갯벌(람사르 해안보존습지)과 연계시켜 관광자원화 하고 있다. 장도에서 노둣길로 연결되는 목섬이 코끼리 유배 섬이라 확정짓고 있는 단계다. 그렇지만 목섬을 ‘코끼리 섬’이라 단정 지을 아무런 증거가 없다.

단순히 장도라는 이름 때문에 여수 웅천동의 장도 역시 유력한 ‘코끼리 유배 섬’ 후보지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코끼리 유배지는 아니다. 여수 웅천동 장도는 최근 ‘명품 예술의 숲’으로 개발이 추진되고 있다. 전남도와 여수시, GS칼텍스는 2021년부터 3년간 50억 원을 투자해 바다‧하늘‧섬‧숲 등 청정 자원을 활용, 여수 장도를 블루 이코노미 대표 숲으로 조성해 나갈 계획이다.

여수와 보성의 장도는 조선시대 말을 키워내던 목장이 있었던 곳이었다. 태종이 코끼리를 사복시에서 보살피라고 명을 내렸던 만큼 유배 길에 나선 코끼리를 보살핀 사람들은 사복시 소속 감목군(監牧軍)이었을 것이다. 백야도 등 여수 화양면 일대에는 큰 목장들이 있어 말 키우는 감목군들이 많아 아무래도 코끼리를 ‘지키기’에 수월했을 것이다.

코끼리는 큰 수레위에 통나무로 만든 사각우리에 갇힌 상태로 옮겨졌다. 큰 고개를 넘거나 길이 험할 때는 코끼리를 우리에서 나오게 한 뒤 걷게 했다. 남해안에 도착했지만 코끼리를 섬으로 옮기는 것도 문제였다. 코끼리를 실을 수 있는 큰 배가 있기는 했지만 배에 옮겨 태우는 것이 난제였다. 그래서 코끼리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 병선(兵船) 각 10척씩이 코끼리몸에 묶은 밧줄을 달고 코끼리를 헤엄치도록 했다.

해안에서 섬까지 코끼리가 헤엄을 치도록 한 부분도 여수 장도가 코끼리 유배지였을 것이라는 심증을 굳게 해준다. 보성 장도는 벌교에서 여객선으로 20분을 가야 있는 섬이다. 코끼리가 헤엄쳐서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이에 반해 여수 장도는 신성포에서 200여m 떨어진 곳에 있다. 썰물 때는 거리가 더 짧다. 우여곡절 끝에 코끼리는 장도에 상륙했을 것이다. 그리고 ‘유배생활’을 시작했었던 것이다.

■코끼리, 섬과 전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전라도 땅 외딴 섬에서 코끼리는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귀양살이 코끼리’보다 더 고역을 치른 사람들은 순천부에서 살던 백성들이었다. 엄청난 식성을 지닌 코끼리는 얼마 되지 않아 장도의 풀들을 모두 먹어치웠다. 할 수없이 사람이 먹는 곡식들을 대줘야 했다. 왕이 유배를 보낸 코끼리를 굶겨 죽이는 것은 왕에 대한 불충이었다. 어떻게든 코끼리를 먹여 살려야 했다. 이 탓에 애꿎은 백성들의 허리가 휘기 시작했다.

순천부사는 각 현에 지시를 내려 곡식들을 거두도록 했다. 하루에 4~5말의 콩을 먹어치우는 코끼리를 보살피느라 지방 관리와 백성들은 죽을 맛이었다. 순천부사는 지금의 보성, 여수, 광양 등지에서 조곡을 거둬들여 코끼리 양식을 조달했으나 갈수록 백성들의 원망이 커져 입장이 곤란해졌다. 그래서 태종에게 상소를 올려 ‘식량이 부족한 상황인데 코끼리 먹이로 하루에 쌀 두말과 콩 한말을 조달해야하니 너무도 힘들다’며 대책마련을 호소했다.

순천부사의 호소에 이어 코끼리가 장도로 유배를 온지 지 2년 쯤 지난 뒤 전라도 관찰사가 태종에게 코끼리에 관한 소식을 다음과 같이 올렸다.

‘코끼리를 순천부 장도에 방목하고 있는데 풀을 먹지 않아 날로 수척해지고 있으며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

전라도 관찰사는 ‘풀을 먹지 않아’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는 다소 왜곡된 표현으로 보인다. 실제로는 코끼리가 ‘풀이 있어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풀이 없어서 굶는 바람에 수척해진’ 상황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태종은 순천부사의 호소를 받아들여 전라도 고을 각 수령들이 돌아가며 얼마동안씩 코끼리를 돌보도록 했다. 코끼리는 여기저기로 끌려 다니며 전라도에서 7년을 살았다.

■충청도에서 사고 친 코끼리, 장도로 다시 끌려와 굶어죽다

전라도 지역 각 고을 수령들의 불만이 높아져갔다. 사람들도 먹을 것이 없어 쩔쩔매고 있는데 코끼리에게 너무 많은 양식이 들어가서였다. 전라도 관찰사는 장계를 올려 ‘코끼리(象)라는 동물이 쓸 데에 유익 되는 점이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지금 전라도 네 곳의 변방 지방관에게 명하여 번갈아가면서 먹여 기르라 했습니다. 하지만 폐해가 적지 않고, 도내 백성들만 괴로움을 받고 있으니, 청컨대 충청(忠淸)·경상(慶尙)도까지 돌아가면서 기르도록 명(命)해 주소서’라고 건의했다.

태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세종은 조선 8도에서 각 1년씩 코끼리를 돌보라고 일렀다. 전라도에 있던 코끼리는 세종 3년(1421년)에 충청도로 보내졌다. 그런데 코끼리가 충청도 공주에서 또 사고를 치고 말았다. 먹이를 주던 사육사를 발로 밟아 죽여 버린 것이다. 배고픔에 화가 나있던 코끼리가 제 성질을 못 이겨 발생한 사건으로 보인다.

이에 충청도 관찰사는 세종에게 ‘10년 전 공조판서를 지낸 이우를 죽인 코끼리가 또다시 먹이를 주던 종을 죽였으니 더 이상 키울 수가 없습니다. 먹이로 주는 꼴과 콩이 다른 짐승보다 열배나 됩니다. 하루에 쌀 2말과 콩 1말씩이 들어갑니다. 1년이면 소비되는 쌀이 48섬, 콩이 24섬입니다. 그런데다 화를 내면서 사람을 해치니 이익은 없고 해가 될 뿐입니다. 코끼리를 원래 키우던 섬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마땅한 줄 아룁니다’라는 내용의 장계를 올렸다.

이에 세종은 코끼리를 다시 장도로 돌려보냈다. 그러면서 ‘물과 풀이 좋은 곳을 가려서 코끼리를 내어놓고,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고 명했다. 애물단지 코끼리가 다시 돌아오자 순천부 관리들과 백성들은 갑갑해졌다. 식량이 부족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결국 코끼리는 이듬 해 굶어죽고 말았다. 인도네시아에서 온(대만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코끼리는 조선 땅에서 ‘한 많은 10년 세월’을 보내다 숨을 거뒀다.

조선에는 없는 동물이라 조선국왕에게 보내진 귀물(貴物)이었지만, 너무도 많이 먹는 식성 때문에 죽음을 맞고 만 것이다. 어떻게 보면 동물들의 습성과 식성을 고려하지 않은 인간들의 욕심과 무심함 때문에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고 볼 수 있다. 순천 장도는 인도네시아(대만)-일본-조선 3국의 외교관계 때문에 선물로 돌려지다가 억울하게 죽은 코끼리의 사연이 있는 곳이다. 코끼리 먹이를 대느라 허리가 휘어지던 전라도 백성들의 한숨이 배어있는, ‘슬 픈 코끼리 이야기’다.

■한반도 역사 속에 등장하는 코끼리 기사(記事)

<삼국사기>에는 코끼리로 추정되는 동물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삼국사기>권 10 신라본기 소성왕 2년 5월 기록에는 ‘신라 소성왕 때 기이한 짐승이 나타났다’는 내용이 있다. 소성왕은 799년에 즉위한 신라의 왕이다. 기록에는 ’몸은 길고 높으며 꼬리의 길이가 석 자 가량이나 된다. 털은 없고 코가 긴 놈이 현성천에서 오식양으로 향해 갔다’고 적혀 있다. 내용인즉 ‘코끼리가 강원도 지역에 출현했다’는 것이다. 석자 가량의 꼬리는 지금 단위로는 69cm 정도다.

실크로드 지도. 가장 오른쪽의 반도가 한반도다. 맨 위쪽 실크로드 상에 samarqand(사마르칸트)가 자리하고 있다.
실크로드 지도. 가장 오른쪽의 반도가 한반도다. 맨 위쪽 실크로드 상에 samarqand(사마르칸트)가 자리하고 있다.

8세기 무렵, 신라는 국제무역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었다. 당나라와 일본은 물론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 이슬람권 상인들과 긴밀하게 교역을 하고 있었다. 먼 옛날 신라와 이슬람권 상인들이 신라와 왕래가 잦았다는 것은 경주 일대에 남겨진 유적이나 유물에서 확인되고 있다. 중동과 유럽에서만 생산되던 보석과 수공예품이 신라유적에서 발굴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로시압 박물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로시압 박물관.

천마총에서는 페르시아 사산 왕조 때 유행했던 유리잔이 발굴됐다. 미추왕릉에서는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인면 유리구슬도 출토됐다. 경주박물관 월지관 앞뜰에 있는 석조 유물 입수쌍조문(立樹雙鳥紋)은, 잎이 무성한 나무가지 아래로 두 마리 새가 긴 목을 교차하면서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인데 전형적 페르시아 문양이다.

아프로시압 벽화중 사절단 부분
아프로시압 벽화중 사절단 부분
아프로시압 벽화와 최혁 기자
아프로시압 벽화와 최혁 기자
아프로시압 벽화 중 조우관을 쓴 한반도인.  긴 새털을 꽂은 모자를 쓰고 있는 우측 두 사람이 한반도(고려)에서 온 사절이다.
아프로시압 벽화 중 조우관을 쓴 한반도인. 긴 새털을 꽂은 모자를 쓰고 있는 우측 두 사람이 한반도(고려)에서 온 사절이다.
아프로시압 사절단 벽화 중 한반도인(손가락 위쪽의 두 사람)
아프로시압 사절단 벽화 중 한반도인(손가락 위쪽의 두 사람)

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경주 괘릉 무인석상의 얼굴은 전형적인 서역인이다. 이 서역인이 입고 있는 옷은 소그디아 풍이다. 소그디아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에 있던 왕국(동페르시아)으로 고구려·통일신라와 외교 및 교역관계를 갖고 있었다. 사마르칸트 아프로시압 벽화에는 조우관(鳥羽冠)을 쓴 고구려사신이 그려져 있어 서역과 한반도와의 교류관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처용 역시 신라에 와서 살던 서역인(西域人)으로 여겨지고 있다. 처용과 관련된 이야기는 ‘처용이 어느 날 술에 취해 밤늦게 집에 와보니 역신(疫神)이 아내와 정사(情事)를 하고 있었다. 처용은 슬펐으나 화를 내는 대신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이에 감동한 역신은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는 처용의 가면만 봐도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다’ 는 내용이다.

이후 한반도 사람들은 처용의 그림(畫像)을 질병 부적으로 삼았다. 처용의 모습은 벽사(辟邪)부적의 효시랄 수 있다. 부적에 사용되는 문자문양도 페르시아 혹은 아랍 문자에서 변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사>에는 현종과 정종 때 수 백 명의 이슬람 상인들이 고려에 왔다고 기록돼 있다. ‘현종 15년 열라자(al laza) 등 100여명, 다음 해 하산라자(hassan laza) 등 100여명, 정종 6년 11월 보나합(barakah) 등이 왔다’고 적혀있다.

‘대식국(大食國,Tashi)이라는 이방국에서 하산, 라자와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왔고, 그들의 자국 생산품을 왕에게 바쳤다’고 기록돼 있는 것이다. 고려 사람들이 대식국으로 부르던 나라는 아랍제국이다. 몽골의 고구려 지배 당시에는 중국대륙에 들어와 있던 위구르족과 아랍상인들이 대거 고려 땅으로 몰려왔는데 이들은 ‘회회’(回回)로 불렸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회회인에 대한 기록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고려해보면 신라에는 서역에서 온 이슬람 상인들이 데려온 코끼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금동대향로에도 코끼리를 탄 선인(仙人)의 모습이 조각돼 있다. 이 향로는 코끼리가 새겨진 우리나라 최초의 유물이다. 백제인 역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코끼리라는 동물을 잘 알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10년 5월 12일자 기사에는 ‘연산군이 코끼리 발을 사들이라 지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권24 산장잡기(山莊雜記) '상기'(象記)에 코끼리에 관한 내용이 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코끼리를 직접 보지 못한 상태에서 코끼리를 도자기에 새겨 넣곤 했다. 그래서 생김새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는데 코끼리를 직접 본 박지원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소 몸뚱이에 나귀 꼬리, 낙타 무릎에 호랑이 발톱, 짧은 털, 회색빛, 어진 표정, 슬픈 소리를 가졌다. 귀는 구름을 드리운 듯 하고 눈은 초승달 같다. 두 개 어금니 크기는 두 아름이나 되고 키는 1장(丈. 약 2.1m) 남짓이다.

코는 어금니보다 길어 자벌레처럼 구부렸다 폈다 할 수 있다. 또 굼벵이처럼 구부러지기도 한다. 코끝은 누에 끄트머리 같은데 물건을 족집게처럼 집어서 둘둘 말아 입속에 넣는다. 어떤 사람은 코를 부리로 여기고 코가 어디에 있는 가 살핀다. 코가 이렇게 생겼을 줄은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연암 박지원은 또 이렇게도 표현했다.

‘코끼리는 겉모습은 둔해보여도 성질은 슬기롭다. 눈매는 간사해 보이면서도 얼굴은 덕스러웠다. 코끼리는 새끼를 배면 다섯 달, 혹은 열두 해만에 낳는다고 한다. 해마다 삼복이면 금의위 관교들이 의장 깃발을 높이고 쇠북을 울리면서 코끼리를 데리고 선무문 밖으로 나가 목욕을 시킨다. 이럴 때면 수만 명의 구경꾼이 모인다.’

코끼리라는 한국어 이름은 유래가 단순하다. 그냥 코가 긴 모습을 표현해 ‘코길이’-‘코기리’-‘코끼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코끼리라는 단어의 원형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문헌은 세조 때 간행된 불경 언해서 ‘월인석보’(月印釋譜)다. 코끼리는 불교에서 매우 상서로운 동물이다. 보현보살의 탈것이기도 해 불교서적에 자주 등장한다.

■ 제사의 제기(祭器)로 사용됐던 코끼리 모습의 그릇

조선시대 코끼리 모양을 한 제기가 사용됐다. 코끼리 모양의 제기를 한자(漢字)로는 상준(象尊)이라 한다. ‘尊’이라는 한자는 발음이 ‘존’과 ‘준’, 두 가지다. 존중(尊重)이라는 단어처럼 ‘尊’이 높임말로 사용될 때는 ‘존’으로 읽는다. 다른 한편으로 술잔을 의미할 때는 ‘준’이라고 발음한다. 코끼리를 뜻하는 ‘상’(象)과 술잔 준(尊)이 합쳐져 상준이 된 것이다.

남송말기에 중국에서 제작된 <사림광기>(事林廣記) 후집(後集) 권11에는 여러 가지 그릇(器用類,기용류)을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尊(준)이 ‘그릇’을 뜻하는 글자로 사용됐다. 이 책에서는 그릇의 종류를 대준(大尊)ㆍ산준(山尊)ㆍ상준(象尊)ㆍ희준(犧尊)ㆍ호준(壺尊)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 기준은 크기나 모양, 기능에 따른 것이었다.

경모궁의궤 (상준)
경모궁의궤 (상준)
국조오례의 (상준)
국조오례의 (상준)
상례보편(상준)
상례보편(상준)
종묘의 궤(상준)
종묘의 궤(상준)

<사림광기>에는 상준(象尊)의 특징에 대해 ‘코끼리 모습을 본떠 술잔 복부 위를 장식하고 붉은 칠을 했다. 가운데 아가리는 지름이 1척2촌이요 바닥 지름은 8촌이다. 상하 빈 공간은 지름이 1척5푼이고 다리 높이는 2촌이다’라고 적고 있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조선시대에 코끼리 모습의 제기나 코끼리를 그려 넣은 도자기가 제작된 것이다.

성균관대박물관에는 백자상준(象尊)이 있는데 왼쪽은 순백자이며 오른쪽은 철화백자다. 그런데 모습이 돼지나 두더지를 닮았다. 짧은 다리에 비대한 몸이 영락없는 돼지다. 그렇지만 코는 돼지의 것이 아니다. 코를 두드러지게 길게 표현했다. 코끼리 모습을 닮은 그릇을 만든다고 하면서 돼지몸통을 닮은 코끼리 형상을 빚은 것은, 도공이 코끼리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백자상준(성균관대박물관소장) 연합뉴스 사진
백자상준(성균관대박물관소장) 연합뉴스 사진
코끼리문 청화백자병(경희대 중앙박물관 소장) 연합뉴스 사진
코끼리문 청화백자병(경희대 중앙박물관 소장) 연합뉴스 사진

경희대 중앙박물관에도 코끼리 문양을 그려 넣은 ‘코끼리문(文) 청화백자병’이 있다. 그런데 문양은 코끼리라기보다는 호랑이와 같은 맹수의 모습이다. 이 역시 코끼리를 보지 못한 도공(화공)이 풍문으로만 들은 코끼리 모습을 그려 넣었기 때문이다. 코가 긴 것을 보면 코끼리를 그려보자고 한 것은 맞는데 몸통이나 발은 실제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앞에서 밝힌 연암 박지원의 코끼리 묘사 글 중에 ‘소 몸뚱이에 나귀 꼬리, 낙타 무릎에 호랑이 발톱, 짧은 털, 회색빛, 두 아름 크기의 두 개의 어금니, 긴 코’와 같은 표현이 있는데 도공들은 이런 묘사를 토대로 해 상상력만으로 코끼리를 그린 것이다. 이런 탓에 전혀 코끼리 같지 않은 코끼리 문양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나주 남평 강변도시에 코끼리상이 있는 이유

나주시 남평읍 양우내안애 아파트 1차와 2차 단지 가운데에는 ‘타이거즈 거리’가 있다. 이거리는 나주시가 지난 2016년 ‘혁신도시와 광주광역시 중간지점에 조성 중인 강변도시를 활성화하기 위해’ 조성했다. 이 거리에는 타이거즈 야구단의 유명 감독과 선수들의 핸드프린팅 등 각종 조형물이 들어서 있다.

나주 남평에 있는 타이거스 거리.
나주 남평에 있는 타이거스 거리.

타이거즈 거리는 넓이 12m, 길이 200m의 보행자 전용 도로이다. 이곳에는 ‘빨간 장갑의 사나이’ 김동엽 감독과 ‘코끼리 감독’ 김응용 감독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흉상을 지나면 서정환, 선동열, 김봉연, 이종범, 김종국, 윤석민, 나지완, 안치홍, 이용규 등의 핸드프린팅 30개가 바닥에 놓여 있다.

거리 옆에는 엘리펀트 건물도 들어서 있다. 건물 좌우측에는 코끼리 상 두 개가 세워져 있다. 코끼리 상 아래에는 수여산(壽如山,산처럼 장수하고) 거천재(去千災, 천가지 재앙은 물러가고), 부모천년수(父母千年壽,부모님은 천년장수하시고) 자손만세영(子孫萬世榮, 자손은 만세영화를 누리리라),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 땅을 쓰니 황금이 나오고) 개문만복래(開門萬福來)와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타이거스 거리에 있는 김응룡 감독 흉상
타이거스 거리에 있는 김응룡 감독 흉상

남평에 타이거즈 거리가 들어선 것은 좀 의외다. 강변도시를 개발한 ㈜초안산업개발 관계자와 전·현직 타이거즈 선수와의 인연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안산업개발은 사업비 3억 원을 들여 타이거즈 거리를 조성했다. 아쉬운 것은 타이거즈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남평 강변아파트 주민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타이거스 엘리펀트 건물 옆에 세워져 있는 코끼리 상.
타이거스 엘리펀트 건물 옆에 세워져 있는 코끼리 상.

조선시대 순천부 장도로 유배 왔던 코끼리는 우여곡절 끝에 뭍으로 올라와 7년 동안 전라도 곳곳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렇지만 코끼리가 살았던 고장은 알려져 있지 않다. 나주는 전주와 함께 전라도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다. 그렇다면 코끼리가 짧은 기간이나마 나주에서 살았을 가능성도 있다. 혹여 지금의 남평 강변은 600여 년 전 코끼리가 풀을 뜯어먹던 곳이 아니었을까? 그런 터무니없을 법한 상상에 절로 실소(失笑)가 터져 나온다.

 

도움말

이성주

김재만

김용필

여수섬사랑(블로그)

랄라라(블로그)문화유산이야기

조원래

 

사진 출처 및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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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타임스 최혁 기자 hyuckchoi@ai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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