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40주기를 하루 앞둔 17일 한낮. 코로나19 여파 속에서도 국립5·18민주묘지를 찾는 일반시민들의 발걸음은 계속 이어졌다. 아이 손을 잡고 온 부모도, 홀로 방문한 시민도 모두 묘역에 향하기 전 분향대 앞에서 희생자들의 넋을 기렸다. 이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추모탑 가운데에 놓인 분향대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민주화항쟁 이후 40년,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이곳을 찾거나 지키고 있는 사람을 만나보았다.
5·18 놓고 왜곡·폄훼는 절대 있어선 안돼
박남선 5·18항쟁 구속자 동지회 상임대표는 민주묘지 앞에서 입장하는 시민들을 반기고 있었다. 그는 1980년 민주화운동 당시 무장군 총 지휘관으로 저항을 주도하다 계엄군에 체포돼 1심과 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인물이다. 3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박 대표는 본인이 겪은 항쟁 과정과 재판기록을 담은 ‘오월 그날(1988년)’을 펴냈다. 최근 민주화항쟁을 두고 극우세력이 폄훼하는 부분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을 실어 개정보증판을 출간했다.
박 대표는 5·18을 두고 ‘미완의 역사’라고 표현했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상규명은커녕 책임져야 할 사람에게 죄를 묻지도 못하는 이유에서다. 거기에 북한개입설 등 끊이지 않는 여론조작 행태는 박 대표를 분노하게 만든다. 박 대표는 “당시 광주시민은 전두환 일당의 악행에 맞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싸웠을 뿐”이라며 “열흘간 금은방 하나 털린 곳이 없다는 것이 그 증거”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층에게 “5.18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바로 알고 반면교사로 삼아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데 초석을 마련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5.18은 먼 역사가 아닌 우리 가족 이야기
나풍균씨(70)의 형 윤균씨(당시 31세)는 그야말로 5·18 혼란 속에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윤균씨는 군부세력에 저항하지 않았지만 영문도 모른채 군인들에게 평동역에서 붙잡혀 끌려갔다. 동생 풍균씨는 한달이 지나서야 형 윤균씨의 생존소식을 알 수 있었다. 형이 있던 곳은 상무대. “면회도 안된다 해서 몰래 누구한테 부탁해서 물품 전달하고…지금도 잘 모른다, 왜 그렇게 끌려가야 했는지” 어느덧 일흔 살 나이가 된 동생 풍균씨는 이렇게 말했다.
풀려난 이후 일상으로 돌아온 윤균씨는 살아있는 동안 고문 후유증으로 늘 고생했다고 한다. 풍균씨의 아들 승우씨는 “제 기억에 큰아버지는 항상 누워 계셨다”고 회상했다. 결혼해서 아이도 낳아 3대를 이끌고 민주묘지를 찾은 그는 “우리 집안에서 5·18 이야기는 자유롭게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며 “어른들이 일부러 언급하지 않는다는 걸 느끼며 자랐다”고 말했다. 또 “(큰아버지는) 이렇게 국립묘지에 누워 계시지만, 큰아버지의 억울한 사연은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산 사람은 늘 마음에 빚 못 지워
김양근씨(67)는 일반 방문객을 대상으로 묘지를 돌며 설명해주는 역사해설가다. 그에게는 살아있다는 미안함, 죄책감이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총탄 소리, 헬기 소리가 무서웠던 그와 달리 한 고교 동창은 민주화항쟁 최전선에서 싸웠다. 바로 박관현 열사(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다.
“붙잡힌 후 40일 동안 단식하다 먼저 가버렸는데, 그 삶 앞에서 난 죄인이다” 김양근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난 이렇게 40년을 미안해하며 살고 있는데, 당시 우두머리인 전두환은 여전히 부인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라고 실소했다.
양근씨는 “광주시민에겐 ‘민주정신’이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호남민중이 앞으로 나오지 않았나. 그 뿌리깊은 정신은 지금 젊은 세대 마음 속에도 자리하고 있다고 믿는다”며 “하루빨리 진상규명이 이뤄져 젊은 세대에게 진실된 5·18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은 바람 뿐”이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