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잘 알아듣지못했어요, 다시 한번 말씀해주세요'라는 이색 전시회가 화제가 됐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이상의 시와 네덜란드 초현실주의 시인 폴 반오스타이예의 시를 인공지능(AI)으로 학습, 해석한 결과를 텍스트와 이미지 및 음악 등으로 표현한 전시회였다. AI를 비롯한 하이테크놀로지를 활용해 시적 감성을 표현한 것이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전시회 총괄 책임을 맡은 박제언 큐레이터를 만나 AI를 전시회에 활용한 배경과 하이테크놀로지를 예술과 접목하는 미디어아트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았다.
"인공지능(AI)이 시를 이렇게 해석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다양한 소통 방식 가운데 하나로 AI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시를 해석한 내용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하고 싶었습니다."
''잘 알아듣지못했어요, 다시 한번 말씀해주세요'라는 전시회를 총괄한 박제언 큐레이터는 "기술에 놀라는 방문객이 꽤 많았다"면서 이번 전시회가 기술을 소개하는 전시회로 비춰지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박 큐레이터가 인터뷰 도중에 수차례 강조한 말도 '전시회에 AI와 같은 하이테크놀로지를 활용할 때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바로 기술이 전시회를 가리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미디어아트 전시 전문 큐레이터라기보다는 하이테크놀로지와 예술을 접목하는 전시 연출을 좋아하는 큐레이터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박큐레이터는 이화여대 일반대학원에서 현대미술사를 전공하고, 2011년부터 아트센터나비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큐레이터의 길을 걸어왔다. 이화여대 박물관과 사비나미술관 등에서 경력을 쌓고, 이후 독립 기획으로 미디어아트 분야 전시와 프로젝트를 해왔으니 10년이상의 경력을 갖춘 전문가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는 이후 태진 인터내셔날과 브랜드 루이까또즈가 설립한 태진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의 선임 큐레이터로 활동해 왔다. 태진문화재단은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다양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모토로 설립한 곳이다.
그가 미디어아트 전시를 처음 기획할 당시는 미디어아트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시기였다. 관심을 가지는 예술가도 적었고, 전시 기획자는 거의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는 미디어아트의 명맥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해 온 셈이다.
실제로 그는 2019년부터 미디어아티스트와 공간디자이너 및 현대무용가와 큐레이터가 모여 다원예술가 그룹 '도타비'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대체불가토큰(NFT)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적 기업 퍼플을 설립, 공동대표를 맡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미디어아트 전시는 AI와 딥러닝 기술이나 확장현실(XR) 기술 등 하이테크놀로지를 접목한 예술작품 전시다. 국내에서는 2020년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최근 예술계에서 가장 핫한 키워드가 됐다.
"이번에 DDP에서 진행한 전시회는 사실 지난달 29일까지만 전시하는 일정이었지만 반응이 너무 좋아서 2일까지로 연장했습니다. 다양한 관람 층위를 수용하려는 목표를 이룬 것 같아 만족스럽습니다."
그는 이번 전시회의 기획 의도를 '관람객들과의 소통'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했다.
그에게 최근 해외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AI가 그린 그림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최근 예술계에서는 AI로 그린 그림을 창작품으로 인정해야 할지 말지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하다.
"회화 작품을 보면서 붓의 종류를 묻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디어아트 전시회에서는 유독 그 도구에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전시의 본질은 도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도구를 가지고 무엇을 표현했느냐 입니다."
그의 생각은 간단하면서도 명료해 보였다. "미디어아트 전시는 도구에 집착하지 말고 무엇을 본질인지를 파악해야 한다"는 당부에서 'AI도 붓과 같은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AI와 관련한 그의 생각은 조금 더 복잡했다. 그는 "AI는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명령하는 대로 그려줄 뿐"이라며 "AI가 그림을 그리려면 '프롬프터'라는 텍스트 명령어가 필요한데, 이는 제작자의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최근에는 프롬프터를 생성해주는 AI가 나왔다"면서 "AI가 구현한 작품도 경우에 따라서는 어느 정도 예술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견해를 내놓았다. 프롬프터를 생성하는 AI 역시 사람이 설계한 도구이니 따지고 보면 AI로 그린 그림도 작가의 의도를 담은 예술 작품으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그는 "기성 작가들도 AI를 비롯한 첨단기술을 활용하는 문제를 매우 흥미롭게 보고 있다"면서 "(AI가 그린 그림 논란은)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정리했다.
"미디어아트의 중심은 한국입니다. 정보기술(IT)에 익숙한 우리나라의 젊은 예술가를 중심으로 활발한 미디어아트 작품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미디어아트를 배우러 해외로 나가면 현지에서 의아해 합니다. 중심지에서 배우지 뭐하러 변두리로 나왔느냐는 거예요."
그는 국내 작가들이 미디어아트 분야를 선도하고 있다는 데 큰 자부심을 보였다. 해외 작가들이 서울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참가한 동료 작가를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최근 들어 미디어아트가 인기를 끌면서 전시 제안이 밀려들고 있다"면서 "하지만 앞으로는 전시회를 맡는 일에 최대한 신중을 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물론 작가의 의도와 전시기획자가 하고 싶은 말을 담아낼 수 있는 전시회라면 언제든 마다하지 않을 계획이다.
그러면서 그는 "큐레이터라는 직업을 단순 예술품 보호 관리사에서 전시 감독으로 바꿔놓은 하랄트 제만을 존경한다"면서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이론적인 기반을 쌓는 동시에 의미있는 전시회를 하나씩 해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성관 기자 busylife12@ai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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