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이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우리는 열광한다. 그가 던지는 찬사에 자부심을 느끼고, GPU 확보 경쟁에서 앞서 나가는 것에 안도한다. 26만장. 확실히 인상적인 숫자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이 GPU로 무엇을 만들 것인가?
한국의 'AI 잠재력'은 이제 수사가 아니다. 초고속 인터넷과 게임 산업이 증명했듯, 우리는 신기술을 가장 빠르게 일상에 흡수하는 민족이다. 문제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GPU를 쌓아두는 것과 그것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있다.
■ 밸류체인의 함정,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AI 산업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한국의 위치는 명확하다. GPU 설계는 엔비디아, 제조는 TSMC, 메모리는 삼성과 SK하이닉스. 우리는 이 체인에서 '부품 공급자'로 단단히 자리 잡았다. HBM 시장 점유율 90%는 자랑스러운 성과지만, 동시에 불편한 진실이기도 하다. 우리는 AI 혁명의 '재료'를 팔고 있지, AI 그 자체를 만들고 있지는 않다.
CUDA 생태계는 이를 더욱 분명히 한다. 엔비디아가 구축한 이 소프트웨어 플랫폼은 사실상 AI 개발의 표준이 되었다. 한국 기업들이 아무리 많은 GPU를 확보해도, 그 위에서 돌아가는 것은 결국 남이 만든 툴과 프레임워크다. 디지털 트윈도, 피지컬 AI도 좋지만, 그것들이 과연 '한국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니면 GPU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가?
■ 전력과 인재, 그리고 더 근본적인 문제
전력 문제는 실제로 심각하다. AI 데이터센터 하나가 중소도시 하나만큼의 전력을 소비하는 시대다. 재생에너지 연계니 침지 냉각이니 하는 것들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 역시 기술적 문제일 뿐이다. 돈과 시간을 들이면 해결된다.
인재 문제는 조금 다르다. '풀 스택 AI 엔지니어'가 부족하다는 진단은 맞다. 그런데 왜 부족한가? 단순히 교육이 실전형으로 바뀌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한국의 AI 인재들이 국내에서 할 일을 찾지 못해 실리콘밸리로 떠나기 때문일까?
핵심은 인재가 모이는 곳에는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구글, 오픈AI, 앤스로픽에 세계 최고의 AI 인재가 모이는 이유는 보수 때문만이 아니다. 그곳에 AGI라는, 인류 역사를 바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어떤 문제를 풀고 있는가? 스마트 팩토리의 효율을 10% 높이는 것? 그것으로 세계 최고의 인재를 끌어올 수 있을까?
■ 소버린 AI, 그 너머의 질문
'소버린 AI'는 매력적인 개념이다. 데이터 주권, 기술 주권, 국가 안보. 모두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솔직해지자. 우리가 '한국형 초거대 AI'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정말 주권 때문일까? 아니면 글로벌 AI 경쟁에서 소외되는 것에 대한 불안 때문일까?
중국이 자국 LLM을 만드는 이유는 명확하다. 검열과 통제다. 유럽이 자체 AI 모델에 투자하는 이유도 분명하다. GDPR과 규제 준수다. 그렇다면 한국은? K-콘텐츠와 헬스케어에 최적화된 모델? 그것이 과연 GPT나 클로드를 쓰면 안 되는 이유가 될까?
소버린 AI가 진정한 의미를 갖으려면, 단순히 '우리도 LLM 하나 만들자'가 아니라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세계가 필요로 하는 AI'를 정의해야 한다. 한국어 처리?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글로벌 빅테크들도 이미 한국어를 지원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국어를 잘하는 AI가 아니라, 한국에서만 탄생할 수 있는 AI 혁신이다.
■ 스피드 DNA의 역설
한국의 ‘스피드 DNA'는 양날의 검이다. 빠르게 받아들이는 것은 장점이지만, 깊이 사유하지 않는 것은 단점이다. 우리는 5G를 가장 먼저 상용화했지만, 정작 5G로 무엇을 할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메타버스에 열광했다가 금세 식었다. NFT도, Web3도 마찬가지였다.
AI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26만장의 GPU를 확보했다는 뉴스에 환호하지만, 정작 그것으로 어떤 미래를 그릴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부족하다. 우리는 또다시 '빠른 추종자(Fast Follower)'의 함정에 빠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담대한 결단이란 무엇인가
결론에서 '담대한 결단'을 이야기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결단해야 하는가? 전력 인프라 구축? 인재 양성? 이것들은 결단이 아니라 관리의 영역이다.
진정한 결단은 이것이다. 한국이 AI 시대에 어떤 나라가 되고 싶은지 선택하는 것. 효율적인 제조 강국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AI 그 자체를 만드는 창조 강국으로 나아갈 것인가. 글로벌 빅테크의 훌륭한 파트너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과 경쟁하는 플랫폼을 만들 것인가.
전자를 선택한다면 26만장의 GPU는 충분하다. 후자를 선택한다면, GPU는 시작일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왜'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다. 그 답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GPU를 쌓아도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의 밸류체인 속 한 부품에 머물 것이다.
양현상 전문 위원(국방융합기술연구소 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