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인공지능(AI) 기술의 핵심인 고성능 반도체를 중국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제재를 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기업들은 다양한 우회 경로를 통해 엔비디아와 AMD의 최첨단 AI 칩을 대거 확보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지난 4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용 'H20' 칩 수출을 전면 금지한 이후에도, 최소 10억달러(약 1조4000억원) 규모의 엔비디아 'B200' 및 기타 금지 칩이 중국으로 반입됐다고 2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 수치는 수많은 계약서와 기업 공시, 그리고 거래에 직접 관여한 인물들의 증언을 종합해 도출된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엔비디아 B200와 'H100', AMD 'MI308'과 같은 첨단 AI 칩을 중국으로 수출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중국 내에서는 이들 칩을 사고파는 것 자체가 불법은 아니며 세금만 제대로 내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우인, 샤오홍슈 같은 SNS에서는 B200 서버나 'RTX 5090' 등이 버젓이 판매되고 있으며, 일부 유통업체는 올해 출시 예정인 'B300' 칩까지 예약을 받고 있다.
이중 B200은 현재 암시장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AI 칩으로, 한 중국 관계자는 이를 구하는 것이 “수산시장에서 생선을 사는 것처럼 쉽다. 없는 것이 없다”라고 밝혔다.
이런 암시장 수요는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예를 들어, B200 칩 8개가 탑재된 한 서버랙의 중국 내 판매가는 300만~350만위안(약 42만~49만달러)으로, 미국 현지보다 50% 이상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
FT는 선전에 본사를 둔 유통 기업 게이트 오브 더 이어라(Gate of the Era)가 서버랙을 수백대 판매해 4억달러(약 5510억원)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추정했다.
또 일부 입찰 문서를 통해 중국 공공기관이 엔비디아 칩을 구매한 정황이 확인됐다고 FT는 전했다.
AI 칩 수요가 급증하며, 중국에서는 아예 금지 칩 수리 전문 산업까지 형성되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선전에는 AI 칩 수리만 전문으로 하는 소규모 업체들이 이미 10곳 이상 운영 중이며, 주로 H100과 A100 GPU를 대상으로 월 500개까지 수리하는 사례도 있다. 이들 기업은 데이터센터 환경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테스트룸을 갖춘 상태로, 공식적인 애프터서비스가 불가능한 엔비디아 칩을 자체 진단하고 복구하는 방식으로 영업 중이다.
이에 따라 미국 정부는 수출통제 강화와 함께 동맹국에도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태국을 환적지로 악용될 가능성을 이유로 규제를 검토 중이다. 미 의회에서도 칩셋 추적 및 위치 인증 의무화를 위한 초당적 법안이 발의됐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강한 제재가 오히려 중국의 자체 반도체 기술 개발을 부추길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수출 통제는 실패한 정책”이라며 “중국은 미국 기술을 우회해 자체 하드웨어 생태계를 구축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중국 화웨이도 독자 AI 칩을 출시했지만, 대형 AI 모델 학습용으로는 여전히 성능이 부족하다는 평이다. 이 때문에 중국 기업들은 미국산 칩, 특히 H100과 B200에 대한 수요를 쉽게 줄이지 못하고 있다.
박찬 기자 cpark@aitime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