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문턱을 넘는 9월의 순천은 유난히 빛난다. 바람은 갈대숲을 쓰다듬고, 습지는 생명으로 가득 차며, 천년의 사찰은 고요하게 숨을 고른다. 그런데 이번 가을, 순천은 여기에 빛과 디지털의 날개를 더한다. 이름하여 2025 세계유산축전.
9월 12일부터 10월 3일까지 단 22일간, 순천은 세계유산을 배경으로 공연·전시·체험·여행이 뒤섞인 거대한 무대로 변한다. 선암사와 순천만 갯벌이라는 두 세계유산이,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품에 안고 우리를 새로운 시간 여행으로 초대한다.
축제의 첫날, 해가 저물어가는 순천만 그린아일랜드 위에 불빛이 켜진다. 판소리의 장단이 공기를 흔들고, 대금 소리가 습지를 감싼다.
무용수들의 발끝이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순간, 밤하늘에는 수십 대의 드론이 별자리를 그린다. 이것이 개막 공연 '생명의 유산, 정원의 무대'.
여기서는 전통과 현대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온 듯한 요소들이 한 무대 위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며 만들어온 순천의 이야기를 전 세계에 들려준다.
관객은 단순히 '보는 이'가 아니라, 빛의 파동 속에서 숨 쉬는 또 하나의 생명이 된다.
천년 사찰을 걷다, 디지털로 만나는 선암사
만약 천년의 시간을 직접 걸을 수 있다면 어떨까? 세계유산축전은 이 상상을 현실로 바꿔놓는다. 프로그램 '만일(萬日)의 수행'은 선암사의 일주문에서 시작한다.
관람객은 AR·VR 콘텐츠와 함께 대웅전, 불조전, 응향각, 설선당을 차례로 지나며 사찰의 역사를 경험한다.
절집의 향내와 고즈넉한 종소리가, 현실과 가상 세계를 넘나들며 몸에 스며든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수행자의 길을 걷는 듯한 이 체험은, 누구나 주인공이 되어 선암사 속에 들어앉는 순간을 선사한다.
생명의 사계절, '갯벌의 무대'
순천만 무진교에 서면, 바다와 하늘 사이로 펼쳐지는 무대가 있다. '갯벌의 사계'라는 이름의 공연이다.
AR 영상이 사계절의 갯벌을 비추고, 퍼펫 공연과 음악극이 어우러지며 생명의 변화를 눈앞에 펼쳐놓는다.
봄에는 갯벌에서 새싹이 움트고, 여름에는 풍요로움이 넘치며, 가을에는 황금빛이 번지고, 겨울에는 고요한 숨결이 감돈다. 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 어른은 잊었던 감각을 되찾는다.
교육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갖춘 이 무대는, 관객 모두에게 환경 보전이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감동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갈대숲에서 맞이하는 밤, '갈대 백패킹'
여행이란 낮과 밤이 이어져야 완성된다. 축전은 관람객에게 단순한 낮의 기억을 넘어, 밤의 순천까지 선물한다.
'갈대 백패킹'은 평소 출입이 금지된 안풍습지를 축제 기간 동안 특별히 개방한다. 갈대숲 속에서 텐트를 치고, 바람의 속삭임을 들으며, 도시의 불빛이 닿지 않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총 세 번, 단 120명만이 경험할 수 있는 이 특별한 야영은 순천만의 자연이 들려주는 가장 친밀한 이야기다.
산사에서의 하룻밤, 템플스테이
"유산을 지킨다는 건, 결국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일지도 모른다." '산사에서 보내는 하룻밤'이라는 이름의 템플스테이는 바로 그 깨달음을 주는 시간이다.
참가자들은 1박 2일 동안 참선, 발우공양, 새벽 예불을 체험하며 일상의 소음을 내려놓는다.
그 고요 속에서 사람들은 문득 깨닫는다. 세계유산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마음을 지탱하는 숨결이라는 사실을.
세계유산축전은 공연이나 체험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순천 시민과 어린이, 해외 방문객까지 모두가 '참여자'로서 무대에 오른다.
스탬프 투어, 어린이 해설 프로그램, 디지털 아카이빙 등은 관람객이 직접 유산의 기록자가 되게 한다.
마을 단위의 시민공모 프로그램은 지역의 삶 자체를 세계유산과 연결시킨다. 그렇기에 이 축제는 누군가가 보여주는 행사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기억이다.
2025 세계유산축전은 단순한 문화축제가 아니다. 그것은 전통과 첨단, 인간과 자연,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호흡하는 거대한 무대다.
올가을, 어디로 떠날지 고민하고 있다면 망설임 없이 순천을 향하길 권한다. 천년의 선암사와 살아 있는 갯벌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세계유산은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현재진행형의 삶이라는 것을 한 편의 시로 노래한다.
- 순천, 천년의 무대 위에서 -
바람은 갈대를 흔들고
빛은 천년의 사찰 위로 내린다.
사람은 길 위에서 과거를 만나고
기억은 현재를 건너 미래로 이어진다.
갯벌의 숨결, 산사의 종소리,
그리고 디지털의 상상력이
한 자리에 앉아 서로를 부른다.
순천은 오늘,
유산을 보여주는 땅이 아니라
유산을 함께 살아내는 무대가 되었다.
여행자는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
이 무대 위에서 누구나
자신의 시간을 노래한다.
양준석 기자 kailas21@aitime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