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트머스 회의는 당대의 쟁쟁한 학자들과 기술자들이 모였고, 훗날 AI 발전을 이끌어 간 많은 주역이 참여한 회의였지만, 회의 그 자체로만 보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매카시가 기대했던 '강렬하고 지속적인 8주간의 과학적 교류'는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8주 내내 전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매카시, 민스키, 솔로모노프 3명뿐이었고, 대부분의 사람이 짧게는 이틀 정도만 회의에 참석했기 때문에 참석자 20여명이 모두 회의할 기회도 얻지 못했다. 기존에 정기적인 교류가 있던 학자들의 모임도 아니었기에, 각자 독립적으로 진행해 온 연구를 바탕으로 참석자의 대부분은 완고한 태도를 취했다.
그래서 서로의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공유하는 공동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또 “상당한 진전을 이룰 것”이라던 매카시의 기대도 지나친 낙관이었다. 각자 자신들이 연구해 오던 내용을 소개하는 자리는 되었지만, 8주간의 회의를 종료할 때 실질적인 진전이나 성과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훗날 매카시는 앨런 튜링과 폰 노이만의 부재를 안타까워했다. 당대의 스타 과학자들로 컴퓨터 개발의 큰 역할을 했으며 컴퓨터로 지능을 구현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던 두사람이 참가할 수 있었다면, 회의 전체의 구심점이 돼 더욱 활발한 모임과 아이디어의 교환 그리고 공동 작업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튜링은 두해 전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폰 노이만은 암으로 투병 중이었다.
이렇게 1956년 여름의 두달 동안 열린 회의는 구체적인 연구나 공동 작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중요한 몇가지 의미도 가진다. 그것들은 새로운 학문의 분야의 탄생, 인공지능(AI) 연구에 대한 개념 제시, 연구자들 간의 교류 확대에 의한 발전 가속화였다.
특히, 계산 능력이 있는 추상 기계와 그 기계를 이용해서 풀 수 있는 문제를 연구하는 오토마타 이론도 아니고 생명체와 기계 간의 소통과 제어를 통해 시스템을 제어하는 분야인 사이버네틱스도 아닌, 또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는 기계로의 접근하기 위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새로운 컴퓨터 과학 분야를 탄생시킨 것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기술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제안서와 회의 자체를 통해서 AI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고 하나의 학문적인 분야로 자리를 잡게 되며, 회의 참석자와 관련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열정과 희망을 심어주게 됐고 더 많은 학자와 연구가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계기가 됐다.
회의 제안서에서 매카시는 “기계가 언어를 사용하고 추상화와 개념을 형성하며 인간에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고 스스로 향상하는 방법을 시도할 것”이라고 밝히며, 회의를 통해 해결할 몇가지 문제를 제시했다. 그것은 컴퓨터의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의 진보를 통해 자체 성장하도록 하는 것, 탐색적 방법의 효율화를 찾는 것, 감각과 데이터를 추상화하여 처리하는 것, 자연어를 처리하는 방법 그리고 신경망이었다.
이런 것들은 다트머스 회의 이후 AI 연구계에서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급속한 발전을 이룬 머신러닝(ML)의 개념과 다양한 알고리즘의 개발, 자연어 처리, 인공신경망 등을 회의 이전부터 어느 정도 제안하고 예견했다. 특히 이를 수행하고 실현하기 위해 당시의 느린 컴퓨터 속도와 부족한 메모리 용량을 프로그램으로 극복해 보려 했던 것은 1980년대까지의 AI 연구계에서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었던 ‘기호주의 AI(Symbolic AI)’의 접근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다른 의의는 이전까지 많은 교류가 별로 없었던 당대의 가장 빛나는 천재들에게 AI라는 분야를 매개로 교류할 기회를 제공했고 이를 통해 AI 발전의 가속화를 가져올 수 있는 획기적이었던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회의와 참석자들의 면면을 통해서 AI의 역사가 태동했고, 회의 이후 각자의 분야로 돌아가 연구를 더 발전시키거나 후학을 양성하면서 AI에 대한 아주 낙관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던 계기가 됐다.
다트머스 이후 존 매카시와 마빈 민스키는 MIT에서 인공지능연구소를 설립하며 평생을 AI 연구와 후학 양성에 몰두했다. 이후 매카시가 스탠포드대학교에서 인공지능연구소를 설립하며, 미국 동부와 서부 양쪽 끝의 두 인공지능연구소는 AI 기술의 발전을 끌어 갔고 AI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다.
앨런 뉴웰과 허버트 사이먼도 카네기 멜런대학교에 인공지능연구소를 설립하고, 수십년간 공동 작업을 하며 AI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 다른 참가자들도 학교, 연구소, 기업으로 돌아가 강의하고 연구하며 AI의 첫번째 황금기를 직접 이끌어내기도 하고, 후학을 키워내면서 AI의 암흑기를 버텨내고 또 다른 AI의 전성시대를 열어나갈 토대를 구축해 줬다.
이미 논리연산 이론가를 개발했던 뉴웰과 사이먼은 다트머스 회의 이후에 인간의 사고 과정을 논리적 기호로 표현하며 모든 문제에 대해 동일한 추론 알고리즘을 사용해 많은 종류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설계한 ‘GPS(일반문제해결기)’를 개발했다. 물론 ‘일반’이라는 범용성과 ‘문제 해결’이라는 과제를 모두 만족시키기에는 상당히 제한적인 프로그램이었지만, GPS는 수단과 목적을 분석하여 접근하는 인간의 문제해결 방식을 구체화한 최초의 프로그램이라는 측면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 시기의 AI 연구는 일부 사이버네틱스와 신경망에 대한 연구도 있었지만, 큰 흐름은 매카시, 민스키 그리고 뉴웰과 사이먼이 주도한 기호주의 AI였다. 과거 AI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호주의 AI는 ‘전통적 AI’ ‘상징적 AI’ ‘규칙 기반 AI’ ‘논리기반 AI’ 또는 ‘GOFAI(Good Old-Fashioned AI)’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이는 컴퓨터 작동 방식에 맞게 기호와 규칙을 사용하여 지능을 구현하려는 방식으로, 주로 논리적으로 풀이가 가능한 문제를 다뤘다.
컴퓨터는 숫자뿐만 아니라 기호도 연산과 처리를 할 수 있으므로, 인간의 지식을 기호화하고 그 기호 간의 관계를 프로그래밍해 학습하면 비슷한 입력에 대해 컴퓨터도 인간과 비슷한 출력을 낼 것이라는 가정하에 연구했다. 매카시가 다트머스 회의 제안서에서 밝힌 ”학습의 모든 측면이나 지능의 다른 기능은 원칙적으로 너무 정확하게 기술돼 기계가 시뮬레이션하도록 만들 수 있다"라는 전제 아래에서 지능을 구현하는 접근이었다. 이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의 표현 방식이라는 장점과 컴퓨터 프로그래밍과의 유사성 때문에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전성기를 이뤘다.
기호주의 AI는 2차 AI의 황금기에 붐을 이뤘던 전문가 시스템으로 발전하기도 하지만, 신경망 중심의 연결주의 인공지능을 배척하는 부정적인 영향도 끼쳤다. 또 현실 세계의 형상과 상태를 모두 기호화할 수 없어 한정적인 용도로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장벽에 부딪히며 1980년대에 이르러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문병성 싸이텍 이사 moonux@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