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간의 분기점에 서 있다.
KF-21 '보라매'의 성공적 개발로 국내 항공우주산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지만, 동시에 잇따른 경영 투명성 논란으로 공공기업으로서의 신뢰성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제 KAI는 두 가지 시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과거의 의혹에 발목 잡혀 현상유지에 안주하는 '정체의 시간'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이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진정한 글로벌 항공우주기업으로 거듭나는 '변화의 시간'을 시작할 것인가에 중요한 시점이다.
■ 의혹의 시간 – 평양 무인기, 자회사 기업 인수
KAI가 직면한 신뢰 위기는 단순한 개별 사안이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구조적 문제의 연쇄 반응이다. 이른바 '의혹의 시간'은 언론보도에 따르면 평양 무인기 불법 계약 의혹에서 시작되어 D사 자회사 편입, J사 인수, 그리고 최근 AI 파일럿 수의계약 논란까지 이어지는 긴 터널과도 같다. 평양 무인기 불법 계약 의혹에서 드러난 것은 절차적 투명성의 부재였다. 1차 납품일이 하청 계약일보다 앞서는 시간적 모순, 단독 수의계약 후 재하청이라는 우회적 논란의 구조는 KAI의 의사결정 과정이 얼마나 불투명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시간의 순서조차 무시하는 비정상적 경영 관행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어왔는지를 방증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디브레인 자회사 편입과 제노코 인수 과정에서 나타난 '관계 중심' 의사결정 구조다. J사 사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동창 관계, 전 KAI 사장의 중계자 역할 의혹 등은 KAI의 전략적 판단이 사업적 합리성보다는 인적 네트워크에 의존하고 있다는 우려를 낳는다. 이런 '의혹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KAI의 공신력은 더욱 훼손되고 있다.
■ 성취의 시간과 한계의 시간 – KF-21 개발, 엔진 개발
KF-21 개발 성공은 분명 한국 항공우주산업사의 '성취의 시간'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빛나는 순간이 오히려 KAI의 구조적 한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각성의 시간'이 되었다. 항공기 개발에서 가장 핵심적인 엔진 기술을 여전히 미국 GE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진정한 기술 독립까지는 아직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큰 문제는 엔진 개발에 대한 전략적 방향성의 부재가 '기회를 놓치는 시간'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롤스로이스 등 해외 기업들의 공동 개발 제안에도 불구하고 KAI는 명확한 엔진 개발 로드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한화에어로스페이스 같은 다른 기업들이 이 시장을 선점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항공기 시장에서 엔진은 단순한 부품이 아닌 생태계의 중심축이라는 점에서, KAI가 놓치고 있는 이 '골든타임'은 미래에 치명적 손실로 돌아올 수 있다.
수리온 헬기의 해외 진출 부진 역시 '준비 부족의 시간'이 가져온 결과다. 기술적 완성도는 인정받았지만 해외 인증, 마케팅, 유지보수 등 글로벌 시장에서 요구되는 종합적 역량을 구축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다.
■ 무인기 시장의 기회와 위험
급성장하는 무인기 시장은 KAI에게 새로운 '기회의 시간'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D사 인수 과정에서 드러난 성급함과 불투명성에 이어, 최근 AI 파일럿 개발 과정에서 또 다른 논란이 불거지면서 이 소중한 시간이 '위기의 시간'으로 변질되고 있다.
KAI는 AI 파일럿 개발 과정에서 투명성과 기술 종속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AI 파일럿 기술은 미래 항공전의 핵심이며, 이 분야에서의 기술 종속은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문제다. 무인기 기술은 단순한 기계 공학을 넘어 AI, 통신, 센서 기술이 융합된 첨단 분야이기 때문에, 해외 기업과의 협력은 불가피하지만 그 과정에서의 투명성과 기술 주권 확보는 더욱 중요해진다.
KAI가 무인기 분야에서 선도 기업이 되려면, 과거의 불투명한 인수·합병 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투명한 전략적 제휴를 추진해야 한다. AI 파일럿 개발 논란은 단순히 하나의 계약 문제가 아니라, KAI의 미래 기술 전략과 파트너십 방식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요구하는 '성찰의 시간'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윤리적 요구가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이다.
■ 전환의 시간 – 투명성, 경쟁력이 되는 순간
KAI가 진정한 글로벌 항공우주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필요한 '전환의 시간'을 맞이했다. 이는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을 넘어,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혁신의 시간'이어야 한다.
첫째, 모든 의사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이해관계자들의 감시를 받는 '개방의 시간'을 시작해야 한다. 공공기업으로서의 책임성과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신뢰성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과제다. 이는 단기간에 완성될 수 없는 장기적 프로젝트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해야만 미래의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둘째, 기술 독립을 위한 장기적 로드맵을 수립하는 '전략의 시간'이 절실하다. 엔진 개발은 단기간에 이룰 수 없는 과제지만, 명확한 목표와 단계적 접근 없이는 영원히 불가능한 꿈으로 남을 것이다. KAI는 엔진 개발을 위한 전략적 파트너십을 적극 모색하되, 이 과정에서 투명성과 합리성을 철저히 견지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10년, 20년 후를 내다보는 '장기 비전의 시간'을 설정할 때다.
셋째,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한 종합적 역량을 구축하는 '역량 강화의 시간'이 필요하다. 기술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증, 마케팅 등 고객이 요구하는 모든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통합적 역량을 체계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 의혹의 시간을 넘어 도약의 시간으로
KAI의 미래는 지금 이 순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과거의 '의혹의 시간'을 덮고 넘어가려 한다면, KAI는 영원히 국내 시장에 갇힌 중견기업으로 머무르는 '정체의 시간'을 반복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혁신의 기회로 삼는다면, 진정한 글로벌 항공우주기업으로 거듭나는 '도약의 시간'을 시작할 수 있다.
투명성은 제약이 아니라 경쟁력의 원천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신뢰받는 기업만이 장기적으로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진리다. 지금은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수습의 시간'이 아니라, 근본적 변화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는 '창조의 시간'이어야 한다.
KAI가 의혹의 시간을 글로벌 도약의 시간으로 전환할 수 있을지, 그 답은 투명한 경영과 기술 독립에 대한 확고한 의지에서 나올 것이다. 한국 항공우주산업의 미래가 KAI의 시간 선택에 달려 있다. 이제는 의혹과 논란의 '어제'를 뒤로하고, 진정한 혁신과 투명성으로 무장한 글로벌 리더의 '내일'을 만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양현상 전문 위원(방산우주산업연구소 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