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엔비디아의 인공지능(AI) 칩이 중국의 새로운 감시 대상이 됐다. 중국 정부는 최근 미국이 수출하는 고급 반도체에 추적 기능을 의무화하려는 움직임에 대응해, 엔비디아의 ‘H20’ AI 칩에 원격 접근이나 제어를 가능하게 하는 ‘백도어(Backdoor)’가 존재하는지를 집중 조사하고 나섰다.
로이터는 31일(현지시간) 중국 인터넷 규제 당국인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CAC)가 7월 말 엔비디아 관계자들을 소환해 H20 칩에 잠재적인 보안 취약점이나 백도어 존재 여부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고 관련 문서를 제출하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CAC는 미국 정치권과 AI 전문가들이 H20 칩에 이미 위치 추적 및 원격 종료 기능이 내장되어 있다고 주장한 점을 언급하며 보안 우려를 공식화했다.
이에 대해 엔비디아는 “사이버 보안은 매우 중요하다”며 “누구도 원격으로 접근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백도어를 칩에 탑재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중국 측의 우려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CAC는 성명을 통해 엔비디아 칩에 ‘심각한 보안 취약성’이 존재한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밝혔고, 향후 제재나 규제 조치에 대한 가능성은 열어뒀다.
이번 사안은 미국이 지난 4월 엔비디아의 H20 칩 수출을 일시 금지했다가 7월 초 이를 철회하며 판매가 재개된 직후에 발생해, 엔비디아의 중국 내 사업 전망에 다시 불확실성을 드리우고 있다. H20 칩은 미국 정부의 수출 제한을 피하기 위해 엔비디아가 중국 시장 전용으로 개발한 제품이다.
시장에서는 이번 조치가 단순한 기술 검토를 넘어 미·중 간 반도체 패권 갈등의 연장선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 의회는 현재 AI 칩 수출 시 칩의 이동 경로를 추적할 수 있는 위치 인증 기능과 원격 제어 장치를 의무화하는 ‘반도체 보안법(Chip Security Act)’을 추진 중이다. 중국은 이를 자국 기술 주권 침해로 보고, 미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규제를 통해 대응하는 모양새다.
한편, 엔비디아는 중국 시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최근 TSMC에 H20 칩 30만 개를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중국 내 수요가 여전히 높다는 점을 보여주지만, CAC의 조치로 인해 실제 출하가 지연되거나 제한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엔비디아는 중국의 AI 스타트업은 물론 군 관련 기관, 국영 연구소, 대학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고객층을 확보하고 있으며, 젠슨 황 CEO는 이달 초 중국을 방문해 정부 관계자와 회동하고 현지 AI 생태계를 적극 치켜세우는 등 ‘중국 친화’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CAC의 갑작스러운 공개 경고는 엔비디아가 중국 내 입지를 장기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선 기술력 외에도 정치적 유연성이 필수적임을 시사한다.
찰리 다이 포레스터 애널리스트는 “중국 정부의 보안 점검은 즉각적인 판매 재개에 걸림돌이 될 수 있으며, 국내 반도체 자립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은 앞서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에 대해 ‘심각한 보안 위험’을 이유로 주요 인프라 납품을 금지했고, 인텔 제품에 대한 보안 심사를 촉구한 바 있다. 엔비디아 역시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조사받고 있으며, 이스라엘 칩 업체 멜라녹스 인수와 관련한 약속 이행 여부도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박찬 기자 cpark@aitime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