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기술의 대화, 박종군 장도장이 들려주는 '산호의 뿌리' 이야기
"장도는 단순한 칼이 아닙니다. 혼례의 약속이며, 지조의 증표였고, 몸과 마음을 지키는 품속의 무언(無言)이었습니다."
한 뿌리 뽑힌 뽕나무가 칼이 되고, 다시 산호처럼 아름다워진다. 이 한 자루의 작은 칼에 담긴 이야기가 광양에서 다시 깨어난다.
국가무형유산 장도장 보유자 박종군이 오는 4월 24일부터 26일까지 광양장도전수교육관에서 열리는 공개행사를 통해 그 생생한 기술과 철학을 전한다.
주제는 '장도장, 뽕나무 뿌리가 산호가 되도록'. 칼을 넘어선 한 시대의 정서, 그리고 미래와 대화하는 기술의 전수다.
장도란? 작고 아름다운, 그러나 단단한
'장도(粧刀)'는 한자 그대로 '꾸밀 장(粧)'과 '칼 도(刀)'를 합한 말로, 단순한 무기가 아닌 의복과 품위를 갖춘 사람의 도구이자 장식품이었다.
조선시대 여인들이 허리춤에 찼던 '은장도(銀粧刀)'는 특히 '호신용'의 기능 외에도 혼례, 성년례, 출가 시 집을 떠나는 딸에게 주는 길상과 보호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자체로 사랑과 염원이 깃든, 작은 세계였다.
장도는 손바닥 크기의 칼날에 고운 무늬를 새기고, 자개·은·호박 등을 장식한 칼집을 더해 공예와 무기의 경계를 허문 예술품이자, 마음을 담는 ‘소지형 문화유산’으로 진화해 왔다.
박종군 장도장, 3대째 이어온 손의 역사
광양장도박물관과 장도전수교육관을 이끄는 박종군 장도장은 가업을 잇는 3대 장인이다.
1대 장도장이었던 부친은 늘 말씀하셨다. "장도는 손으로만 만들어선 안 된다. 마음과 숨결을 같이 넣어야 한다."
이번 공개행사는 장인의 철학을 그대로 담는다. 매일 오전 10시, 오후 2시 직접 장도 제작 실연이 이뤄지고, 관람객은 작업공방과 전시실을 모두 오가며 그 흐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뿌리째 캐낸 뽕나무가, 어떻게 강철처럼 단단한 칼날로 깎이고, 다시 산호처럼 아름다운 장도로 태어나는지, 장인의 손끝에서 생명이 부여되는 순간을 만날 수 있는 자리다.
전통과 AI, 더 가까워진다
전통공예와 AI, 전혀 다른 세계 같지만, 지금은 오히려 더 깊은 함수 관계를 맺고 있다.
예컨대, 장도 제작의 곡선과 문양은 이제 3D 스캔과 AI 모델링 기술로 디지털 아카이빙이 가능하다.
전통 기법을 정밀하게 저장하고 분석해, 유사한 디자인 생성이나 복원 작업에 응용될 수 있다.
실제로 일본과 유럽의 일부 박물관에서는 AI를 통해 고대 무기의 미세 문양을 재현하고, 재료의 손상도를 예측해 보존 전략을 세우는 데 활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박종군 장도장이 말하는 '은장도의 의미'는 지금 시대의 '휴대 가능한 의미'와도 닮았다.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예측하고 안내하는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작은 물건 하나에 깃든 정성과 감정, 이야기에 더 큰 울림을 느끼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은장도'는 보호와 기원의 의미가 있다. 옛 여인들이 은장도를 지니며 자신을 지키려 했듯, 오늘날의 현대인들도 정신적 위로와 안전의 상징으로 소지형 문화유산에 다시 눈을 돌리고 있다.
작지만 확실한 예술인 은장도는 소형 칼날에 담긴 문양과 재료의 조화는 대량생산으로는 절대 구현할 수 없는 장인의 고유성이다.
기억의 매개체로서 장도는 단순한 칼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만들고, 떠나는 이에게 건네는 기억의 조각이다. 그것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한 감정의 보존이다.
광양시의 김명덕 문화예술과장은 "장도는 하나의 도구를 넘어서 삶의 가치와 미의식이 담긴 문화 기호"라며 "이런 문화유산을 통해 전남이 가진 전통 기술의 깊이와 정체성을 시민과 나누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렇다. '은장도'는 단순히 옛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과 손이 빚은, 감정의 코드다.
AI로 자동화된 세상이 더욱 빠르게 돌아가는 지금, 오히려 손으로 만든 느린 작업이 다시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고 있다. 기술이 잊고 간 '정서'를, 전통은 여전히 품고 있다.
장도의 칼끝은 예술이고, 그 칼집은 기억이다. 그리고 그 작은 기억 하나가, 이 시대를 꿰뚫는 이야기로 살아남는다. 산호가 된 뽕나무 뿌리처럼.
▸행사명: 2025 국가무형유산 장도장 공개행사
▸주제: 장도장, 뽕나무 뿌리가 산호가 되도록
▸일정: 2025년 4월 24일(수)~26일(토), 오전 10시/오후 2시
▸장소: 광양장도전수교육관(광양장도박물관)
▸문의: 교육관 공식 홈페이지 및 블로그
양준석 기자 kailas21@aitime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