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중립 시대, 기후위기 가속, 글로벌 공급망 재편. 이제 대한민국의 산업 입지 전략이 바뀌고 있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전라남도가 있다.
바로 RE100.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을 100% 재생에너지로 충당하자는 글로벌 캠페인이자, 이제는 애플·구글·BMW 등 초국적 기업들이 부품 공급 기업에 요구하는 필수조건으로 자리 잡은 흐름 때문이다.
▪수도권에선 RE100 불가능...전남은 '과잉 재생에너지'로 역설적 여유
RE100 연례보고서(2024)에 따르면, 한국 제조업체들의 재생에너지 사용률은 12%에 불과하다. 유럽은 83%, 베트남 51%, 인도 39%에 달한다. 그마저도 LG이노텍과 같은 일부 애플 협력업체를 제외하면 대부분 20~30% 수준이다.
특히 국내 대표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국내 반도체 부문은 각각 24.8%, 30% 수준이다. 애플의 공급망에서 퇴출당하지 않으려면 2030년까지 이 수치를 100%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전라남도는 남아도는 재생에너지로 오히려 계통 연결에 제한을 받는 지역이다.
이미 2024년 기준 10GW의 설비가 가동 중이며, 2031년까지 42GW로 확장될 예정이다. 반면 수요는 9GW를 넘지 않는다. 에너지가 남아도는 곳이 전남이고, 에너지가 부족한 곳이 수도권이다.
▪'송전망 대공사'의 환상... 국토 난개발·시간 부족·비용 폭탄
정부는 이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기 위해 해저 케이블, 송전탑, 지중화 작업 등 이른바 '에너지고속도로' 건설을 계획 중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이는 막대한 비용과 사회적 갈등을 동반하며, 2030년까지 완공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회의적인 전망을 내놨다.
전문가들이 이런 회의적인 전망을 하는 배경으로 "대표적인 사례가 밀양 송전탑 분쟁"을 사례로 지적했다.
이어 "10년 넘게 사회적 갈등과 지역 반발을 낳았던 그 교훈을 정부는 잊어선 안 된다"며 "결국 RE100을 달성하지 못해 글로벌 공급망에서 도태되는 것은 시간문제다"고 꼬집었다.
RE100이 가능한 지역에, RE100이 필요한 산업을 유치하면 된다. 다시 말해, 재생에너지가 넘치는 전남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상은 단지 에너지 효율성만을 위한 게 아니다. ▲재생에너지 활용률 제고 ▲RE100을 통한 글로벌 공급망 유지 ▲지역균형발전과 수도권 과밀 해소 ▲송전망 건설 불필요까지 1타 4피의 해법이 된다.
특히 이재명 정부가 추진 중인 'RE100 산업단지 특별법' 제정과 신속한 산단 조성 계획은 전남에게 전략적 기회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전남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첫째, RE100 산업단지를 반도체 중심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지금까지 산업단지 유치는 '기업 유치' 자체에 초점을 맞춰 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안에서 어떤 산업이 들어오느냐가 훨씬 중요해졌다. 특히 단일 공장 기준으로 전기를 가장 많이 쓰는 산업이 바로 반도체다.
전남이 보유한 재생에너지를 제대로 활용하고, RE100 산단을 실질적으로 작동하게 하려면, 가장 먼저 '반도체 팹'을 유치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RE100 산단을 '반도체 전용 클러스터' 수준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면, 세계 시장에서 대한민국 반도체 경쟁력도 한층 강화될 것이다.
둘째, 중앙정부와 손잡고 '전남형 RE100 모델' 설계에 앞장서야 한다. 현재 정부는 관련 특별법 제정과 산단 조성을 위해 TF를 구성하고 있다.
전남은 그 흐름에 단순히 따라가는 지역이 아니라, 제도를 함께 설계하는 '선도 지역'이 되어야 한다.
전력 직거래(PPA) 제도의 특례 적용, 배전망 우선 배정, 에너지 기반 정주 여건 조성 등 'RE100+반도체 산단' 실현을 위한 맞춤형 제안을 중앙정부에 적극 건의하고, RE100 시대를 이끄는 대표 지역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셋째, "지방엔 인재가 없다"는 오해부터 깨자. 반도체 공장은 인재가 있어야 돌아간다. 그래서 "지방에 지으면 사람 없어서 안 된다"는 말이 종종 나온다. 하지만 이는 근거 없는 고정관념일 뿐이다.
삼성전자의 중국 시안 공장, SK하이닉스의 우시 공장 모두 수도권에서 수 시간 거리의 '외딴 지방'에 있지만, 지금도 수많은 한국 인재들이 현지에서 근무하고 있다.
비행기를 타고 중국까지는 갈 수 있으면서, 정작 국내 지방으로는 못 간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전남은 접근성도 좋고, 자연환경도 쾌적하다. 여기에 고급 인재들이 가족과 함께 정착할 수 있도록 기숙형 고교, R&D 캠퍼스, 산학협력 단지, 국제학교 같은 교육·정주 인프라를 갖춰나가야 한다.
중앙정부와 협력해 이러한 인프라를 패키지로 기획하고, '사람이 머무는 산업단지'로서 RE100 산단을 완성해야 한다.
전남이 RE100 시대, 반도체 시대, 기후위기 대응 시대의 전략적 거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치면, 남아도는 전기를 송전망으로 보내기 위한 단순 '에너지 저장고'로 머물 공산도 크다.
이재명 대통령이 RE100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국정 과제로 설정한 지금, 전남은 '에너지에서 산업까지'를 관통하는 미래 청사진을 주도적으로 그려야 한다.
이제 전남이 묻는다. "재생에너지도 있고 땅도 넓고 의지도 있는데, 반도체가 왜 수도권에만 있어야 합니까?"
양준석 기자 kailas21@aitime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