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은 오늘도 시한폭탄 위에서 일한다"
여수·광양·목포 산업단지의 노후화, 위험 외주화, 무책임의 구조

"수십 년 된 설비, 언제 터질지 몰라요." 전남 여수·광양·목포 등지에 위치한 주요 산업단지(산단)는 대한민국 제조업의 핵심 축이다. 그러나 이들 산단은 조성된 지 20년에서 많게는 60년이 되어가고, 설비 대부분은 노후화돼 있다.

2025년 3월, 대불산단에서 20대 하청노동자가 후진 차량에 압사당했다.
2025년 3월, 대불산단에서 20대 하청노동자가 후진 차량에 압사당했다.

대표적으로 1967년 조성된 여수국가산단은 한국 최대의 석유화학 단지이지만, 2020년부터 5년간 13건의 중대사고로 12명이 사망했다.

특히 2022년 2월, 여천NCC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는 이 문제의 단면을 보여준다. 당시 4명이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입었다. 노후된 열교환기에서 시작된 작은 불씨는, 충분한 예방 조치가 없는 상태에서 순식간에 대형 참사로 이어졌다.

"배관이 삐걱거리는 소리에도 가슴이 철렁합니다. 하지만 이걸 고치려면 설비 전체를 세워야 하니까, 늘 '괜찮겠지' 하며 넘어갑니다." 여수산단에서 20년째 일하고 있는 한 노동자의 말이다.

이러한 통계를 바탕으로 볼 때, 여수국가산단은 전국 국가산단 중에서도 중대사고 발생 빈도가 높은 편에 속한다.

노후화된 설비와 복잡한 하청 구조 등이 이러한 사고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종합적인 안전대책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한다.

"하청의 하청,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설비 노후화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하청 구조'다. 여수와 목포 대불산단 등에서는 하청의 하청까지 이어지는 고용관계가 일반화돼 있다. 위험 작업일수록 외주화되고, 사고가 나면 책임은 공중으로 사라진다.

2025년 3월, 대불산단에서 20대 하청노동자가 후진 차량에 압사당했다. 그보다 20개월 전에도 같은 업체에서 하청 노동자가 200kg 철제 구조물 해체 중 추락사했다.

하지만 원청은 "현장에 없었다", 하청은 "직접 고용이 아니었다"고 발뺌했다. 결국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 속에서 노동자의 생명은 쉽게 외면당했다.

"위험한 작업일수록 하청에게 맡깁니다. 그래야 사고가 나도 책임을 피할 수 있으니까요." 전남의 한 플랜트노조 간부는 "이런 구조가 유지되는 한 노동자들은 항상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들 노동자 다수는 계약직·일용직·파견직으로 고용돼 있다. 고용이 불안정하다 보니, 설령 위험을 감지하더라도 "말을 아끼게 된다"고 한다. 하청노동자 C씨는 "위험하다고 말하면 계약 연장 안 될 수도 있어서 그냥 시키는 대로 한다"고 털어놨다.

'중대재해처벌법'도 뚫는 원청의 무책임

2022년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은 원청 책임 강화를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실제 적용은 미비하다. 법의 요건이 지나치게 엄격해 대부분의 사고는 처벌로 이어지지 않는다.

지난 2003년 대림산업 폭발, 2022년 여천NCC 사고, 2024년 대불산단 청년노동자 사망. 사고 양상은 20년 전과 그대로인데, 책임은 여전히 흐릿하다. 하지만 '중대재해처벌법'도 무용지물일 때가 많다. 

여수산단 하청노동자 D씨는 "이 법이 무서운 건 우리 같은 하청이지, 원청은 여전히 법망을 잘 피해간다"고 꼬집었다. 

형식적 안전관리와 무기력한 행정도 문제점이다. 여수산단의 안전관리는 고용노동부 여수지청과 전남도가 맡고 있지만, 형식적 점검, 사후관리 위주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 크다.

산단 관계자는 "안전교육도 사진 찍고 끝나고 현장 개선은 없다"고 질타했다.

전문가들은 "지방정부 주도의 산업단지 안전공공감시위원회 설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특히 자율에 맡긴 '설비 교체'는 또 다른 참사를 부른다.

현재 전남지역 산단 내 고위험 설비는 대부분 단기적으론 20여 년에서 최장 60여 년 가까이 사용됐다. 그러나 교체 기준은 기업 자율에 맡겨져 있고, 설비 수명 기준조차 업체마다 다르다.

여천산단 관리자 E씨는 "고위험 배관, 가스설비는 20~25년이면 전면 교체 대상인데, 기업 자율로 맡기고 있어 이런 것들이 엄격한 의미에서 참사를 기다리는 것이다"고 질타했다. 

전남도와 고용노동부의 책임 공백…이제는 '책임 감시체계' 만들어야

여수산단의 안전관리는 고용노동부 여수지청과 전라남도 산업안전부서가 공동으로 책임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사후 점검 위주에 머물러 있고, 정기 안전교육조차 ‘형식적 점검’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전문가들은 "산업단지 단위의 독립적인 안전감시 시스템" 도입을 제안하고 있다. 이는 중앙정부-지방정부-노동자-전문가가 참여하는 '산단 안전공공감시위원회' 형태가 될 수 있다.

산업안전문가 박 모 교수는 "중앙정부가 모든 산업단지 감시를 할 수 없다"면서 "지방정부가 실질적 책임을 져야 하고, 국고보조와 책임구조 정비가 따라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노후 고위험 설비의 '주먹구구식' 교체는 안 된다. 여천산단 내 일부 업체들은 내부적으로 고위험 설비 교체 계획을 수립하고 있지만, 이는 대부분 자율적 판단에 의존해 있어, 설비 수명 기준조차 업체별로 들쭉날쭉한 상황이다.

이에 대해 산단 관계자들은 산단 단위로 공공 안전진단체계를 수립하고, ▲노후 설비 목록화 ▲위험도 기준에 따른 등급별 관리 ▲위험군 우선 국도비 보조 교체 로드맵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여천산단 현장 안전관리자는 "고위험 배관, 저장탱크, 가스설비 같은 건 20~25년이 지나면 전체 교체 대상이 된다"면서 "이걸 기업 자율에 맡기는 건 또다시 참사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일갈했다. 

전남형 '산단 구조개혁 5개년 계획' 시급

이제는 전남 전체 산단을 대상으로 한 구조적 개편과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산단안전전문가들은 "'노후설비 안전진단법'을 제정하여 국가 주도의 진단과 '국도비 보조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이들은 또한 "전남도 차원의 '산단 안전감시기구'를 설치하여 '민관노동자 참여형'으로 정기 점검 및 정보공개를 정기적으로 발표함으로써 투명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설비 교체 로드맵 및 위험 등급 공개 의무화로 '주민 알권리 강화'와 '위험군 우선 국고 지원'을 하고 '하청·파견 구조 규제 강화 조례'를 제정하여, '원청 책임 확대'와 '고용구조 실태조사 병행'을 강제할 필요가 있다"고 법적, 제도적 장치마련을 주문했다.

한마디로 "사고 이후의 대책 말고, 사고 이전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대책 강화 요구가 나오는 것은 지금까지의 안전대책은 참사 이후의 땜질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전남 산단은 대한민국 제조업의 심장이지만, 그 심장은 낡았고, 위험하며, 책임 없는 구조에 둘러싸여 있다.

노동자의 생명을 담보로 한 산업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이제는 정책과 예산, 시스템이 답할 차례다. 

양준석 기자 kailas21@ai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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